아빠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삶의 배움터였어요. 삶에 항상 열정적인 아빠를 보며, 나도 커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으니까요.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커 보고 나니 아빠의 목소리, 말투, 표정, 제스처, 걸음걸이 등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빠는 항상 나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건축가인 아빠가 정반대 분야인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어요. 손이 크고 투박한 건축가가 매우 섬세한 시를 써 내려간다니, 반전 매력이 가득했던 거죠.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아빠가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꽤 오랫동안 시를 써왔던 거예요.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을 한 뒤로부터는 전국 각지의 많은 시인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어요.
시인들과 식사를 하고 나면 아빠는 항상 집으로 시인 분들을 초대했어요. 우리 집이 전원주택에, 게다가 옥상 3층에 정자와 그리고 갖가지 야채와 채소, 꽃나무들이 즐비해 있으니 시인들의 독자적인 아지트로는 안성맞춤이었어요. 시인들은 항상 아빠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아빠는 고집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언행을 절대 하지 않았어요. 항상 배려하고 챙겨주고, 게다가 유머러스까지 하니 시인들 입장에서는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을 거예요.
시인들은 본업이 따로 있는 분도 계시고, 전업 시인도 있었지만 어린 내 눈에는 시인들 모두 괴짜같이 보였어요. 도인 같은 할아버지도 있었고, 술 먹다가 갑자기 감정이 올라와서 즉흥시를 읊는 한 중년 시인의 모습에 나는 어린 나이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어요.
아빠는 항상 시인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나를 데리고 갔어요.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어요. 한 번은 시 발표회가 있었어요. 여러 시인들이 모여 장소를 대관하여 본인의 시를 낭송하고 담소를 나누는 그런 행사였어요. 드디어 아빠 차례가 되었어요. 아빠가 강단으로 올라가는데 그 걸음걸음이 평소보다 매우 과장해서 씩씩하게 걷는 것이었어요.
'무언가 이상하다, 아빠 걸음걸이가 오늘 왜 저러시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팔척장군처럼 듬성듬성 강대상에 그대로 올라가더니, 아빠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모든 사람들을 무장해제시켰어요.
"아, 제가 방위(그때 당시 공익) 출신이라, 걸음걸음가 이렇게 씩씩합니다"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은 무장해제가 된 채, 박장대소를 했어요. 나는 그제야 왜 아빠가 평소보다 그렇게 과장된 걸음걸이를 했는지 알았어요. 말 한마디로 본인과 청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분위기를 확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던 거예요.
아빠는 사실 논산 육군훈련소 조교 출신이었어요. 조교 출신이라면 남들보다 군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하고 장병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군 관련 지식과 기술이 뛰어나야 해요. 그런데 방위 출신이라고 밝힌 것은 '논산훈련소 조교 출신'이라는 자신감이 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예요. 실제 방위 출신이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잘 자리에서 방위 출신을 곧이 강조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나를 깎으면서까지 유머를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사실 많은 주위 시인들은 아빠가 평소에도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그것조차 유머라고 이해했을 거예요. 그렇게 시인 행사는 성황리에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을 만나러 가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됐을 거예요. 아빠는 나에게 급히 어디를 가야 할 곳이 있다면서 따라나서라고 했어요.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 차에 타서 물었어요.
"아빠, 저희 어디 가요?"
"응, 우리 지역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만나러 갈 거야. 아빠가 국회의원과 면담시간을 미리 예약해 두었단다. 같이 가서 이것저것 두루두루 얘기하고 오자꾸나"
나는 그 당시 국회의원이 대충 높은 사람인 것은 알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자리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어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높은 사람을 실제로 본다고 하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어요.
내가 알기로 아빠는 정당활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하거나 어떤 특정 정당에 대해 적극 지지를 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여느 기성세대의 사회 구성원처럼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을 뿐, 그렇다고 열성적으로 어떤 특정 정치인을 후원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정당을 어필을 하지는 않았어요. 어쨌든 아빠가 같이 가자니까 따라나섰죠.
국회의원 사무실은 예상보다 작았지만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어요. 책장에 꽂혀있는 많은 책의 숫자에 압도되었어요. 국회의원은 아빠와 나에게 차례로 악수를 권한 뒤, 매우 선한 미소로 우리들을 챙겨주었어요. 아빠가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의원님의 국정활동과 지역 내 지원 활동에 대해 꾸준히 봐왔고 관심 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찾아뵌 이유는, 앞으로 큰 정치를 부탁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빠는 어떤 구체적 정치적 어젠다나 구체적 지역 내 이권을 위한 구체적 사안을 얘기하지는 않았어요. 초등학생인 내가 들어도 대략적으로 두리뭉실한 그런 대화를 이어 나갔어요.
국회의원도 이미 아빠가 무슨 의도인지 파악을 했는지, 분위기를 가볍게 가져가며 대화를 이어나갔어요.
국회의원이 나에게 물었어요.
"장래희망이 뭐예요, 학생?"
"저는 외교관이 꿈이에요."
"혹시 그럼 혹시 비스마르크가 누군지 아니?"
"아니오, 잘 몰라요"
"나중에 아빠에게 꼭 여쭤보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란다. 앞으로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를 바랄게"
국회의원은 나에게 앞으로의 비전과 꿈에 대해 얘기해주고 덕담을 해주었어요. 본인 출판한 도서에 친필 싸인까지 해서 나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어린 나의 시각에서는 아빠가 높은 국회의원과 30분 면담을 이어나가는 것만 해도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때 당시 무척 떨렸거든요. 그때 국회의원과 면담을 끝내고 아빠는 말씀 나눈 국회의원 칭찬을 많이 했어요. 아빠가 평생 몇 안 되는 인정하는 국회의원이라고요. 그리고 그 국회의원은 추후 6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의장 자리까지 올라갔어요. 아빠가 보는 눈이 정확했던 거죠.
국회의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얘기했어요.
"아들, 모든 정치의 주체는 우리들, 즉 국민이야. 우리가 주체가 되어야 해. 그들이 그들 마음대로 정책을 줬다 폈다 하도록 놔두면 안 된단다.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잘하는지, 잘 못하는지는 우리 주민들이 항상 견제하고 지켜봐야 해. 오늘 의원과 만났을 때, 무엇을 느꼈니?"
"처음에 긴장이 많이 됐는데,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책에 친필 싸인도 해서 주시고 감사했어요. 그리고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됐어요"
지금 커서 생각해보니, 그때 아빠는 사실 아빠가 정치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 국회의원을 만나러 갔던 것은 아니었어요. 아빠는 나에게 세상의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시켜 주기를 원했던 거예요. 국회의원을 한번 만난다고 해서 어떤 특정 정책이 달라지거나, 내가 사는 동네 이권을 취하지는 못해요. 다만 그 행위를 통해서 아들에게 국민의 '주권'이 무엇인지, 정치 참여를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아빠 스스로 몸소 실천했던 거예요.
성장해 오면서 정치, 문화, 사회, 예술, 역사,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식견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빠의 영향이 컸다고 봐요. 말로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아빠는 많이 있을 거예요. 아들과 직접 시간을 보내고 경험하고 추억을 쌓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자 가치임을 아빠의 헌신을 통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