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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의 끝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들

<조용히 걷는 생각들> (7)

by 이호준

이사를 준비하며 다시 한번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낀다. 낡은 옷과 안 보는 책, 쓸모를 잃은 식기와 전자제품,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과 오래된 가방까지. 하나씩 손에 들 때마다 잠시 멈칫하게 된다. 물건마다 기억이 담겨 있고 그 추억이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막상 버리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 물건들이 있었는지조차 금세 잊혀진다. 아깝거나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싹 다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남겨진 것 중 가장 많은 것은 책이다. 이미 몇 해 전 이사 때 수백 권을 정리했고, 그때 고르고 또 골라 남기고 새로 들인 것들이다. 남은 책들은 대부분 사진과 에세이에 관한 것이다. 사실 다시 펼쳐볼 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보여주는 흔적이자, 앞으로의 삶을 함께할 도우미다. 물건을 버리며 새삼 드는 생각은 기억은 형태가 아니라 마음속에 남는다는 것이다. 손에서 떠난다고 해서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컵 하나에도 온기가 배어 있고, 낡은 셔츠 한 벌에는 젊은 날의 기운이 스며 있다. 물건이 사라져도 그 기억들은 내 안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언젠가는 이 책들마저 버릴 날이 올 것이다. 삶이란 결국 비워내는 과정이고, 나이가 들수록 더 가벼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짐을 줄이는 일은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일이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 또 다른 시간과 인연이 스며들 것이다. 버림의 끝에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움튼다.


# 사진: 용산구 한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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