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가 스코틀랜드에 놀러 왔었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은데 무엇보다 고사리가 천지에 널렸다는 걸 제일 신기해했다. 9월의 고사리는 산들거리는 푸른 잎과 말라빠져서 누레진 잎이 섞여 있었다. 어찌나 키가 크던지. 내 어깨에 닿을 만큼 훌쩍 올라와 있었다. 어렸을 적 아빠가 고사리를 캐려고 누나 손을 잡고 산을 헤집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보물덩어리가 평평한 흙이나 도로가에 잡초처럼 무더기로 올라와 있으니 신기할 법도 하다. 아빠는 고사리를 만지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날고사리를 보았다. 매번 말린 고사리를 사다 물에 불려서 요리하곤 했지만 땅 위로 솟은 고사리숲 광경은 처음이라 나 역시 놀라웠다. 아빠는 고사리 어린순이 봄에 올라오니까 그때 따먹으라고 했다.
장담하건대 무인도에서 사람을 데려다가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면 아빠가 살아 나올 가능성에 8 한을 걸겠다. 이래 봬도 아빠는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을 끼니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을 가졌다. 예를 들어 나에게 토끼풀은 반지나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액세서리풀에 불과했다. 토끼 꼬리처럼 복슬거리는 하얀 꽃이 보이도록 묶어서 약지 위로 끼우면 딸들이 좋아했었다. 아빠는 토끼풀이 식용이란다. 토끼 꽃을 털털 털어서 씨앗을 모으면 어린 아빠의 엄마가 깨처럼 고슬고슬 볶아 주었다. 밀이 있는 날이면 움푹 파인 돌에다 밀을 넣고 자근자근 찧어 가루를 만들었다. 가루 반죽 위로 하얀 꽃을 얹어 노릿노릿 예쁘게 구워 먹었다. 흰쌀이 귀하던 그때는 토끼 꽃과 이파리가 식탁 위로 자주 등장하는 주식이었다. 어디 토끼 풀 뿐인가. 민들레, 국화나 호박꽃도 그랬다. 뿌리까지 먹을 수 있는 풀도 있다. 달래, 머위, 두릅, 냉이. 다 고만고만하고 푸르스름한 잡초과에 속하는 것들. 내가 정의하는 잡초는 그렇다. 거추장스럽고 쓸모없어 확 뽑아야 시원찮은 풀이라고. 사전적 의미로 잡초를 찾아보니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되어 있다.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기고 나면 이런 여러 가지 풀들이 볶아지고 삶아지고 무쳐지면서 어린 아빠에게 살아갈 기운을 불어주었다. 여러 해 동안 아빠는 밥심이 아닌 풀심으로 단단해졌다.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고사리 숲과 어린순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미국에서 릴리라고 불리는 이모가 그다음 해에 놀러 왔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에게 내가 자주 등산하는 달라(Dollar) 언덕을 보여주고 싶었다. 달라 언덕에는 스코틀랜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캠벨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든 되는 이모가 가파른 협곡 사이를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조금은 걱정이었지만 지팡이 하나로 씩씩하게 잘도 올라갔다. 아름다운 달라언덕을 흠뻑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모가 소리쳤다.
"고사리다!"
마치 산에서 산삼이라도 찾은 심마니처럼 이모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런 걸 고사리라고 하다니. 또르르 말린 고사리 끝부분이 세련된 지팡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에 아빠랑 같이 봤을 때는 이미 지는 고사리였고 이번 고사리는 푸릇푸릇함의 자태를 우아하게 뽐내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스코틀랜드에선 고사리가 울창한 숲을 이룰 만도 하다. 그때부터 우리의 목표가 달라졌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캠벨성은 이미 관심에서 멀어졌고 고사리를 수확하기에 나섰다. 지나가는 현지인이 '이런 잡초를 왜 뽑을까' 이상하게 쳐다봤을지도 모르지만 8살 아들부터 80세의 릴리까지 모두가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고사리를 한 두 개 꺾다 보니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부지런히 캐온 고사리를 장시간 물에 담갔다 한소끔 데쳤다. 몇 다발은 냉동고에 쟁여놓고 몇 다발은 곱게 다진 마늘을 송송 넣어 고사리 무침을 만들었다. 집 안에 고소한 내가 가득했다. 또 몇 다발은 육개장용으로 찐하게 우려낸 고기육수 안에 퐁당 집어던졌다. 보들보들 씹히는 고사리가 육개장의 얼큰한 맛을 더해 주었다. 너무 맛있으니까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린 아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오늘만큼은 부자가 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