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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도 학습되는 게 있다. 걸음마처럼.

by 제스혜영

아빠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 한다. 알면서 굳이 입 밖으로 뱉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도 있겠고 해 보지 않아서 더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그러니까. 그 반면 남편은 어찌나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는지. '안녕하세요' 하면 고개가 절로 굽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허그는 자주 그리고 자동으로 이어지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유일하게 '사랑한다'를 표현할 때는 우리 남편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아이 러브 유'로 말하곤 했다. 오히려 '아이 러브 유'가 아빠 입에 척 달라붙었고 '사랑한다'는 말은 낯선 외국어처럼 입 밖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국외에 살다 보니 우리는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엔 아빠의 일자리를 빼먹을 수가 없었다. 서울 대학로에서 조그맣게 운영했던 국밥집을 접고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아빠의 나이는 65세. 명예롭게 퇴직할 나이였음에도 평생 직장을 다닌 게 아닌지라 국가에서 지급하는 기초연금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매일 구인 구직소를 출근하며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아빠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언제는 주유소에서 차 청소를 한다고 했었고 또 몇 달 후에는 아파트에서 경비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다 아빠 나름대로 정착해서 일한 곳이 있었는데 인천에 있는 사업장 폐기물 처리업장이었다. 굴삭기를 조립해서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굴삭기를 만들고 남은 고철들을 분쇄기에 넣어 잘게 압축시키면 그 쇠부스러기를 트럭에 싣고 화성에 있는 고물상점으로 운반하는 작업이었다. 어느 공장이든 새로운 산물이 태어나려면 그 전날 싸논 쓰레기를 몽땅 치워놔야 하는 법. 쓰레기 작업은 이른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었다. 고철을 분쇄할 기계는 고요한 새벽을 뒤흔들어 놓았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소음과 땅을 뒤엎을 것 같은 진동, 거기다 주변은 온통 쇠가루투성이었다. 이 일의 대다수 작업자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안타깝게도 고철을 실은 컨베이어벨트에 장갑이 끼면서 노동자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눈에서만 없어지면 될 줄 알았던 쓰레기 처리과정은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다. 아빠는 이 일을 3년 동안 했다. 아빠와 통화할 때마다 '괜찮다' '할만하다'했던 그 폐기물 작업은 고철뿐만 아니라 아빠의 몸과 마음까지 처절하게 분쇄해 버렸다.


“혜영아, 아빠 풍 왔다.”

2013년, 중국 연길로 막 이사를 가고 나서 엄마한테 걸려온 전화였다. 부랴부랴 아빠를 만나러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두고 한국으로 갔다.

“프때에 브브가 돼서.”

풍 때문에 바보가 됐다고. 오랜만에 만난 딸을 쳐다보던 아빠가 부끄러운 듯 턱을 가슴 쪽으로 떨어트리며 말했다. 옹알이 같은 말을 두세 번 반복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몹쓸 마비는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아빠의 신체를 정확하게 이등분했다. 오른쪽 손과 발뿐만 아니라 오른쪽 눈과 입까지 뼈와 근육은 분쇄되고 간당간당 남은 가죽만이 흐늘거렸다. 나는 입원 환자를 옆에서 돌보는 일이 지루할 것 같아 몇 권의 책을 가지고 갔었는데 첫날, 아빠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면서 그게 얼마나 안일한 착각이었던지 금방 깨달았다. 아빠를 휠체어에 태우고 처음으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빠가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아빠 바지를 내리고 등을 돌아 앉았다. 1분이면 될 일이 10분이나 걸렸으니. 식사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의 오른손 숟가락이 밥그릇 위로 가까스로 올라갔다가 휙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빠에게 숟가락은 10 키로쯤 되는 덤벨처럼 무거웠을 것이다. 숟가락을 올리고 이빨을 닦고 머리를 감는 등. 이런 단순한 행동을 왼손이 담당해야 했다. 낯선 왼손을 의지해서 일상을 유지하기란 평생 포크를 사용하던 사람에게 이제부터 젓가락을 쓰라는 것처럼 갑갑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제시간에 맞춰서 치료실을 다니려면 아빠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운동 치료실에 가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언어치료실에선 혀운동을 했다. 체스나 장기 같은 보드게임을 하는 놀이치료실은 아빠가 집 같아서 좋다고 했다. 평소 장기 챔피언이던 우리 아빠, 친구나 가족에게도 지지 않았던 그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 장기 알을 잡으면 자꾸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놈의 졸(병) 하나 전진 한번 못 해 보고 치료실을 빠져나와야 했다. 밖을 나오면서 아빠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으니 나라도 웃었을테다.


뇌경색 환자가 모인 아빠방에는 6명의 환자분이 있었다. 각자 들어온 시기가 달라서 환자들의 생활 능력도 각각이었다. 어떤 분은 아무개가 혼자서 숟가락질을 했다고 하고 어떤 분은 아들이 혼자서 화장실을 다녀왔다며 기뻐했다. 마치 우리 아이가 혼자서 똥 싸고 변기 물을 내렸을 때의 쾌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빠가 걸어서 병원을 나갈 때는 그 방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입원실에 들어왔을 때의 절망감과 걸어 나가고 싶은 간절함을 알기 때문에. 고생했다. 해냈다. 장하다. 희망과 응원이 섞인 마음을 아빠에게 아낌없이 부어줬을 것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생에서 리셋이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걸음마를 배우고 가나다라를 배우는 시간.


내가 마흔 중반에 스코틀랜드로 이사 가면서 새롭게 일자리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했었지만 긴 시간의 경력단절에 스코틀랜드의 억센 영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 내가 한없이 한심하고 부끄럽고 구슬프기만 했던 시간들. 예순다섯 살에 전전긍긍하며 일자리를 알아봤을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아빠의 이메일은 병원 입원 후 끊겼다. 가끔씩 자음과 모음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핸드폰 메시지를 아빠에게서 받았다. 그러다 최근에는 그것도 아예 없어졌다. 하지만 아빠가 리셋 후 새롭게 습득한 것이 있는데 낯선 외국어와 같았던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더 이상 글로 쓸 수가 없어서였을까. 나와 아빠의 통화 중엔 조금은 자연스럽게 '사랑'이란 말을 꺼낸다. 나는 아빠의 리셋을 마주하며 두 가지를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학습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분쇄기를 갖다 댄들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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