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두 살의 김 씨 할아버지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이 받아온 한 달 치 수면제를 꿀꺽 다 삼키고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약이 작아서 마무리될지 모르겠구나. 확실해야 할 텐데..'
손바닥만 한 종이에는 확실하게 죽지 않을 것 같은 염려 말고도 또 하나가 담겨있었다.
'미안하다.'
빼곡하게 8줄의 글이 적힌 종이에는 7줄이 다 '미안하다'라는 말이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했을까.
김 씨 할아버지는 채소장사를 했었다. 이른 새벽부터 수레에 그날 들어온 채소를 담고 골목골목을 다녔다. 그렇게 팔린 채소값으로 오 남매를 키웠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둥지를 떠날 때쯤 할아버지는 경비로 일을 했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아빠와 함께 식사하셨던 사진을 보면 김 씨 할아버지 콧구멍에 산소줄이 끼어 있었다. 밥숟가락 들고 환하게 웃고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백 년까지는 거뜬히 살 것처럼 건강해 보였다.
김 씨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다녀온 아빠와 통화를 했다. 가깝게 알고 지내던 형을 떠나보낸 아빠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해서였다.
“억울하다. 억울해.”
아빠는 죽도록 고생한 형의 삶이 억울하단다. 그의 아내가 죽고 김 씨 할아버지는 외롭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결국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먹으며 삶을 달래곤 했었다. 나는 아빠에게 아빠의 삶도 억울한 것 같냐고 되물었다.
"나는 행복하지. 애들은 잘 지내고 잔소리하는 와이프가 있으니 외로울 틈이 없잖아."
호탕한 웃음과 함께 아빠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아빠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만 아빠가 외로울 거라는 생각은 종종 한다. 밥 사주길 좋아하고 집으로 초대해서 장기 두기를 좋아하던 아빠가 언제부턴가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던 건 12년 전 중풍이 오고부터였다. 지금은 아빠의 건강이 호전되었지만 예전의 건강한 아빠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 분 걸으면 십 분은 의자에 앉아서 쉬어야 하고 말이 어눌해지면서 사람들과 말하는 것도 불편해졌다. 교회에서 그룹끼리 소풍 가는 날이면 아빠는 불안했다. 느릿느릿 걷는 아빠를 사람들이 기다려줘야 하고 의자나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계속 확인할 뿐만 아니라 아빠의 말을 천천히 귀 담아야 할 인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 모든 걸 ‘민폐’라고 불렀다.
내가 외국에서 살다 보니 내 나이 또래의 친구만큼이나 할머니 벌 친구도 많아졌다. 한국 같아선 엄마의 친구와 커피 마시러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무척 어색할 텐데 영어에선 할머니에게 쓰는 존칭어가 따로 없어서 그럴까. 그저 이름을 부르다 보니 친구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까먹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례하다는 말은 아니다. '친구'라면 지켜야 할 존중과 신뢰만 있다면 나이가 문제 될 게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내 친구 할머니와의 대화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처럼 스릴 있다. 할머니와의 산책 또한 즐겁다. 걸음 속도가 느려지다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생겼다. 풀밭 사이로 솟아오른 주먹만 한 버섯이랑 나무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검푸른 도마뱀도 보였다. 혼자 보다 둘이서 발견한 신기함이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아빠가 불렀던 '민폐'라는 건 '행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푸른 하늘을 보면서 이 하늘을 같이 바라보고픈 사람이 있고 노란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손잡고 걸어 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행복은 흘러가는 것 같다.
"아빠 때문에 난 행복해요."
나도 안다. 교과서처럼 낯간지러운 소리라는 걸. 오글거리도록 어색한 말이라는 걸. 하지만 김 씨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빠한테 꼭 해야 할 것 같은 말이았다. 지금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마른침을 삼키며 아빠한테 내 진심을 툭 던졌다. 그나마 핸드폰이라 다행이지. 두 눈을 쳐다봤다면 낯 뜨거워서 쥐구멍이라도 찾았을 터이다. 평생 내 옆에 아빠로 있을 것 같아서 꺼내두지 못했던 말. 이제는 대놓고 말해야겠다. 아빠라는 우주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