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날까지만 해도 입덧하나 없이 건강하게 산에도 다니고, 막달까지도 불편함이 없이 직장에 다녔던 내가 막상 출산 당일 분만 대기실에 가서 누워 있으니 너무너무 긴장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겁이 났다. 남편도 옆에 있었고, 밖에는 시어머니가 와 계셨지만, 그때는 오로지 친정엄마 생각밖에 나질 않았다.
엄마는 당시 직장 다니는 언니를 위해 거의 5일 내내 김해 언니네에 가서 조카를 봐주고 계셨다. 엄만 언니가 늘 일하느라 바쁘고, 집안살림도 할 겨를이 없다고 애들 밥이나 챙겨주겠냐고 걱정하시며, 낮에는 조카들을 도맡아 키우셨다. 엄마에게 언니는 아픈 손가락이며, 본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계신 거 같았다. 내 출산일이 정해지자 엄마는 낮에는 민찬이를 봐야 해서 못 가니 저녁에 병원에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내심 서운하긴 했어도, 어쩔 수 없지.. 알았다고 하고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해서 유도 분만을 하기 위해 간호조무사의 손이 쑥 들어온 이후에는 전에는 느껴보진 진통으로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엄마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 지금 올 수 있어?"
"엄마 저녁에 갈게~ 엄마가 팥죽 쒀놨다~ 그거 들고 갈꾸마"
결국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병원에 오시지 않으셨다.
아이는 12월 21일 오후 12시 40분에 건강하게 태어났다. 의사 선생님 맛있게 점심 드시라고 어쩜 이렇게 이쁜 시간에 나왔냐, 착하다며 그랬던 기억이 난다. 무통분만을 하니 아랫도리에 감각이 없다. 선생님이 마지막 처리를 다하고 나니 마취제 때문인지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상태에서 휠체어를 타고 겨우 화장실에 가고 정신없이 회복실로 돌아왔다. 첫 아이 때여서 병실도 1인실로 쓸데없이 큰 곳으로 예약해 놨다. 휑하니 큰 병실에서 건강한 아이 얼굴을 맞이하니 괜히 눈물이 나는데, 반면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퉁퉁 부어있고, 마지막에 얼마나 힘을 썼던지 실핏줄이 다 터져있고 꼴이 말이 아니다.
다저녁이 되어서야 친정엄마가 봉다리에 뭘 바리바리 싸가지고 도착하셨다. 준혁이가 태어난 날이 마침 동지였고, 엄마는 동짓날이면 늘 팥죽을 쑤셨다.
엄만 늘 그랬다. 드라마에 나오는 세련된 엄마들처럼 다정하게 나를 안아주거나, 우리 딸 사랑한다는 오글거리는 표현 같은 건 못 하는 그런 엄마.. 촌스러운 시골감성의 검은색 봉다리에 20년도 넘은 낡은 플라스틱 그릇에는 팥죽 한 그릇이 멋없게 담겨 있었다. 그리곤 그저 팥죽 묻은 그릇을 손으로 휙 한번 닦아내고, 쑥 내밀며 어여 먹어보라고.. 이런 게 엄마가 내게 보내는 최고의 애정 표현.
몸은 으스러질 듯 아프고, 늦게 도착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마구 올라왔지만 엄마에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늘 그렇듯, 투정 부리지 않는 막내딸... 엄마가 가고 나서야 혼자 서럽게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팥죽은 손도 대지 않았고, 2박 3일 후 퇴원하는 날 다 쉬어버린 팥죽을 통째 버리는 것으로 나 혼자만의 조용한 시위를 했다. 그땐 다 미웠던 거 같다. 엄마도, 언니도, 원인을 제공한 조카 민찬이까지도...
엄마에게는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손자여서 그리 특별하지 않았던 건가? 그래도 막내딸에게는 첫아이 출산인데.. 그런 생각만 하면 격한 감정이 올라와, 병원에 있는 내내 눈물 콧물을 얼마나 흘려 댔던지, 얼굴의 부기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팥죽을 먹질 않는다. 그걸 먹게 되는 순간 나의 눈물 코드를 건드리게 될 것이고, 18년 전 그때의 서러운 감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서다.
몇 년 전 캐나다에 친정식구들이 방문했었다. 12월의 방문이라 준혁이의 생일날도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엄마가 한국 마트를 가자고 하시면서 팥을 한 봉지 사셨다. 준혁이 생일이니 굳이 팥죽을 쑤시겠다는 거다. 엄마는 동지만 다가오면, 준혁이 생일이 다가오는구나 하신단다. 나는 힘들게 여기서까지 무슨 팥죽이냐, 팥죽은 안 먹고 싶다고 하니 그럼 팥칼국수라도 기어코 하시겠다는 거다. 그날 10인분의 팥칼국수는 엄마의 의도와 달리 면이 다 불어버려 맛이 없었다. 그날 처음 나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러게 내가 팥죽 같은 건 싫다 했잖아.. 조용한 외침..
엄마에게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서운함을 직접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될 줄 몰랐다. 엄마에겐 아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부터 눈물이 터질게 뻔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어떤 슬픔도, 고통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맘속에만 그저 꽁꽁 묻어두게 되면 그 안에서 곪아, 결국 폭탄처럼 원하지 않은 장소에서 어이없게 터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쓴다고 내 상처가 아물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 스스로 내게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고 그때의 엄마를 다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엄마는 아마도 팥죽을 쑤시면서 막내딸 순산하라고 평소보다 더 오래 기도 하셨을 거다. 엄만 늘 "니가 잘하고 있는 거다" "니는 걱정이 안 된다" 하시면서 믿는 존재가 막내딸이니까.
나는 큰아이 준혁이 생일에는 치즈케이크를 굽는다. 처음에 아이의 두 번째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치즈 케이크 굽는 레시피를 찾아서 굽기 시작했는데, 그 케이크가 너무 맛있기도 했고, 특별한 느낌이 들어서 치즈 케이크는 준혁이 생일에만 굽는 케이크가 되었다. 아이가 커서 어릴 때의 생일을 생각하면, 엄마의 치즈 케이크가 떠오르지 않을까, 집안에 풍기는 부드러운 케이크 향기를 떠올리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생일에 어쩌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생겨버리면 치즈 케이크를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일이 생기면 준혁이도 치즈케이크는 안 먹게 될까? 물론, 아직까지는 아이 생일에 험한 일이 일어나진 않아서 다행이다. ㅎㅎ
요즘은 아이도 생일상에 딱히 기대하지 않고, 동생들과 달리 표현도 잘 안 하는 덤덤한 녀석이라 나도 이제 케이크는 그만 굽고, 대신 슈퍼에서 맛있는 케이크를 하나 사가지고 온다.
유난 떠는 거는 이제 그만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해마다 해주고 있는 생일상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점점 사라지는 거 보면, 엄마에 대한 그때의 그 감정도 조금은 희석되어 언젠가는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날이 오게 되겠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