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셀러리맨이다. 결혼 전에도 셀러리맨이었고 경단녀 시절을 거쳐서 다시 셀러리맨이 되었다. 나는 셀러리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프리랜서들을 관리하는 일이 내 중요한 업무이기도 하다. 다양한 기능을 보유한 프리랜서들을 보면서 간혹 부러워도 했다가 좀 안쓰러워도 하면서 산다. 부러워하는 건 조직문화에 대한 자유로움이고 좀 안쓰러워 보이는 건 불안정성이다.
셀러리맨 생활을 좀 해본 자로서 조직이 주는 쓴맛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십여 년 전에 경단녀에서 셀러리맨으로 복귀하면서 아주 많이 놀라워했었다. 직장생활 복귀 시점에서 이십 년 전 직장 생활하던 그때보다 더한 횡포에 가까운 상사가 있는 직장분위기에 깜짝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업무 방법이나 결재 수단이 최첨단 시스템으로 바뀌었는데 사람은 더 퇴보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안하무인형 상사가 있는 직장생활이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다 좋을 순 없으니 극복하면서 사는 수밖에...... '라고 체념하면서 살아낸다. 셀러리맨의 비애를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어쩌면 체질화가 되어버렸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한다. 참고 또 참다가 한계를 느끼면 '절이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직을 생각한다.
그런 직장문화가 이제 개화기를 맞은 것 같다. 올해 상반기에도 별난 상사의 무례한 행동에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자가 웬 개화기를 입에 담을까? 힘든 고비를 당당하게 정면돌파하여 개선된 상사의 모습을 보면서 생활하게 되어 개화기를 운운하는 걸까? 뭐 꼭 그래서 그런 표현을 하는 건 아니다. 세상이 진정한 평등의 세상으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 그 핵심 원인은 직장 내 평가 방법이 일방향에서 쌍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반시대적인 상사가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본인이 경험한 상사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고 많은 직원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자 상반기 업무 반성회를 기회로 당당하게 개선 요구를 하게 되어 개선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이후 그 관리자는 프리랜서들과 회의를 하던 중 불쑥 습관적인 본모습을 내비쳐버렸다. 그래서 그 관리자는 당일 직접적인 관련 프리랜서에게 사과를 했었다.
무사히 그 하루가 지났는데 함께 있던 다른 프리랜서분이 최근에 계약기간이 만료되지도 않았는데 그때의 일을 언급하면서 그런 가치관을 갖은 관리자가 있는 곳엘 도저히 계속 다닐 수 없겠다는 것이다. 그만한 일로 본인의 직접적인 업무와 무관한 관리자의 부적절한 행위 때문에 계속 못하겠다는 게 좀 안타까워서 만류도 해보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직장생활에서의 비굴함이 직장생활의 연속성을 가져다준다. 셀러리맨의 체험에서 나온 결과물이 비굴함 이콜 장기근무 뭐 그런 거다. '하루를 살아도 당당하게 살자.'라는 삶의 철학 같은 슬로건이 무색하다. 그런데 아주 신선하게 프리랜서분은 본인의 삶의 철학에 반하는 관리자들과 함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그만두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만한 이유로 그만뒀다면 직장을 다니는 셀러리맨은 한 명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짝 '너 지금 부러워하니?'라고 자문해 보았다.
냉대기후에서 사는 사람은 그 기후에 적응을 하고 산다. 그 와중에 희로애락을 맛보면서 때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낸다. 누군가는 살이 쩍쩍 갈라지기 전에 미리 과감하게 세찬 비바람을 피한다. 비바람을 피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건데 그런 모습을 낯설어한다. 길을 잃은 당당함 자신감을 찾아서 세찬 비바람쯤은 잘 이겨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개화된 세상이 펼쳐질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