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늦은 오후 내가 근무하는 교문 옆 안전지킴이실로 3학년 또래의 여학생이 하교 길 운동장에서 돈을 주웠다며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천 원짜리이기에 '네가 주웠으니 네가 사용하여라' 말하는 게 가장 쉽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래, 내가 보관하였다가 주인을 찾아 주겠다.'는 것도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혹시 여기서 잃어버린 사람이 나타나면 내가 연락해 줄 테니, 주운 네가 돈을 갖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구나." 하였더니, 아이는
“예 알겠습니다.” 하며 돈을 가지고 갔다.
그렇게 아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 나는 그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간 어느 날 아침 등교 길, 호루라기 소리봉을 울리며 정신없이 교통지도를 하고 있는데, 초록 신호등에 한 여학생이 길을 건너 내게 가까이 오더니
"아저씨, 지난번 돈 천 원 주운 아이인데요, 잃어버린 아이가 나타났는지요? 돈을 계속 갖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하~ 맞아,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하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복잡한 이 아침에 그 상황을 이야기하면 나는 또 어쩌란 말인가!
정말 왜 이렇게 난해한 질문이 되어 내게 되돌아오게 되는 것인지! 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세상 사란 게 귀찮아서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지난 일들에 대한 인과응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나의 머리가 또다시 반짝거리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그래, 그걸 아직 갖고 있었다니 정말 착하구나, 돈을 잃어버린 아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단다. 그럼 지금 바로 교실로 가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 보려 무나, 그러면 올바른 처리 방법을 얘기해 주실 거야."
그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예~" 하고 교문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 아이가 사라진 후 나는 내가 너무 그 아이를 피곤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넓은 운동장에서 주운 돈 천 원에 양심, 약속, 정직, 질서 등 나만의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또한 담임선생님은 이 돈을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을지!
이제 그 아이는 무거운 짐을 벗게 되었을까? 등 뒷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매번 교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그 아이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오면서 밝게 인사를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빨간 안경을 새롭게 낀, 바로 그 아이였다.
"아저씨, 저, 안경 새로 했어요. 그런데, 안경알은 없어요."
"그래 안경이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아저씨가 네게 얘기할 게 있으니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먼저 인사를 건네 줄 정도로 그 아이도 내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나도 반갑고 궁금하여,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곧장 가서 물었다.
"그래, 주운 돈 천원은 어떻게 했니?"
"아직 제가 갖고 있어요."
"담임선생님께선 뭐라고 말씀 안 하시더냐?"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래, 그러면, 아저씨가 처리방법을 이야기해 줄 테니 그렇게 하려 무나."
"지금, 주운지가 한 달 가까이쯤 되는 거 같은데!"
"아니, 석 달쯤 되었어요."
그 아이에겐 시간이 꽤 오래된 걸로 느껴지는가 보다.
"그래~, 어찌 되었던, 지금까지 그 돈을 잃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고, 네가 오래 동안 주인을 기다리며 그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확인해 줄 수 있으므로, 이제 네가 부담 없이 그 돈을 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구나."
"예~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래~ 잘 가거라."
운동장에서 주운 천 원짜리 한 장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오랜만에 내 마음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의 자유와 규칙, 개인 간의 약속, 공과 사의 개념, 질서 유지의 방법은 무엇인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 일이다.
최근에 나와 함께 근무한 지킴이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었다. 이 분은 정말 성실하여 아이들이 참 좋아하였다. 평소 버려진 우산을 챙겨두었다가 비 올 때 우산 없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만두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5학년 여학생이 지킴이실로 찾아와 내게 '초코파이' 두 개를 내밀면서 떠나는 지킴이 선생님께 '그동안 고마웠다면서' 이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초코파이 두 개의 가격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여기에 실어 전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천 원의 가치는 아주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살아가면서 누구라도 두 사람 이상의 약속이면 공적인 약속이 되는 것이겠지, 각자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평소 '둘 이상이면 공'이라고 강조하시며 개인 간의 사소한 약속도 귀중히 여기셨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셨던 고향집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잊어 먹었지만 3개월 동안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 준 그 아이가 고맙고 대견스럽다. 단 둘만의 약속만 잘 지켜지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는 잘 유지되어 모두가 평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도 자라지 않는다 했거늘, 천 원의 가치 이상의 지혜와 즐거움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오늘 아침 등교 길에도 인사하며 지나가는 그 아이와 얼굴이 마주쳤다.
"아저씨, 맛있는 거 잘 사 먹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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