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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당 Jul 09. 2021

호명

지난해 가을에 시작한 나의 초등학교 안전지킴이 생활도 해가 바뀌어서 겨울과 봄을 지나 초여름에 다 달았다. 아직 1년간의 일정을 다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처음의 우려와 달리 매일매일이 긴장되지만 즐거운 시간들이다.


누구나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는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하고 얼굴을 기억에 담게 되는 것이리라. 현직에 있을 때는 명함을 전해주며 자연스레 내 이름을 밝히며 손님을 응대하였지만, 안전지킴이는 그렇게 새로운 사람과 만날만한 업무도 없으므로 당연히 명함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학교장이 발급한 노란색 명찰을 목에 걸고 근무를 하게 되는데, 등하교 시의 교통지도를 할 때와 수시로 학교 주변 순찰 업무에 따른 나의 신분증인 셈이다. 또한 주 고객인 전체 학생들에게 내 이름을 표시해주는 최소한의 예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여 목에 명찰을 걸 때면 나는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대단한 사명감과 뿌듯한 자부심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안전지킴이 근무 7개월 여가 지나가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 이름은 거의 없다. 내 이름을 먼저 밝히고 상대에게 인사하는 예전의 습관 탓인지, 교내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이름도 곧바로 물어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또한 나와 아이들 간의 대부분의 대화는 이름을 물어볼 틈도 없이 짧고 명료한 일방적인 나의 인사말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등하교 때의 건널목이나 교문에서 '안녕, 오랜만이구나, 어서 와라, 열심히 해라, 조심해라, 착하구나, 잘 가라' 등이다. 물론 인사를 나눈 후에 돌아서는 아이들의 미소와 해맑은 얼굴은 내 기억 속에 선연하게 저장되어 있다.     


가끔 이름을 알아두고 불러주어야 할 상황도 생겨난다. 유난히 건널목을 늦게 건너는 아이, 건널목을 뛰어가는 아이, 빨간 신호등에도 무단 횡단하는 아이, 싸우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주의, 재발방지를 위해 이름을 묻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지속적인 관심과 호명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어느 날 교통지도를 하고 있는데, 4학년 여자아이가 내 목에 걸고 있는 명찰을 손으로 흔들어 보기도 하고, 또 찬찬히 훑어보고는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며 놀리기도 한다. 

"이 분이 아저씨예요?

"그래, 5년 전 사진이라서 지금과 좀 다르지?" 

(사실 명찰을 만든다고 사진 한 장을 제출할 때, 딱 1장 남아있는 오래된 꽤 젊은 사진을 제출했었다.ㅎ) 

"황금, 금연, 황금연못ㅎㅎ...." 하면서 이름이 재미있다고 떠들어 댄다.

어릴 적부터 내 이름이 놀림감도 되었지만, 지금은 전혀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고 즐거워서 웃음으로 답한다.

"그래, 아저씨 이름이 재미있지?" 하니까, 이름을 몇 번 더 혼자서 불러보더니 

"아저씨! 저는 아저씨 이름을 아는데, 아저씨는 제 이름을 몰라서 안되잖아요!" 하고 따진다. 

"그래! 네 이름을 불러줄 테니, 이름이 뭐니?" 하니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고 길을 건너간다.      


누구라도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고 불리어지는 걸 바라는 순수한 동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김춘수의 시 '꽃'을 언급하지 않고서라도,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 기분이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명된다는 것, 나이 많은 나도 기쁨과 호기심이 일어나는데, 아이들에겐 더 이상 말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 인기의 척도일 것이고, 누구나 자기 이름이 흔쾌히 불러지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일 테니, 이 아이의 이름도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침마다 건널목을 건너서 오며, 교문 앞을 지나는 수많은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름을 알고 있는 몇몇의 아이만을 불러주는 것 또한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호명의 공정성' 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교육을 '사회화 학습'으로 본다면 그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일 텐데, 지속적인 소수에 대한 호명은 특별화 일 것이며 그 아이들에의 편견 편애를 떨칠 수 없게 될 것이리라.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공정하게 불러줄 수 없다면, 단 한 명의 이름도 섣불리 불러서도 안 되리라 생각된다. 호명된 아이의 특별함, 불리지 못한 아이의 서운함이 그들 가슴에 응어리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나는 불공정한 호명보다는 공정한 미소를 선택할 것이며, 인기 있는 정치인보다 더 폭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주시하면서 환하게 웃어주고 그들을 맞이하리라.  

    

지방 선거를 앞둔 요즘 번잡한 사거리에서 안전지킴이 근무가 더욱 신명이 난다. 

왜냐하면 교문 앞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봉을 들고 교통 지도하는 나의 인기를 더욱 실감하기 때문이다. 

각 정당의 구청장과 시의원 유력 후보들이 아침시간 내내 건널목에 서서 방아깨비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눈길을 주거나 반겨 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나의 '안녕하세요' 한마디 인사말에는 수많은 아이들과 학부모들도 반갑게 화답을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코앞을 지나치면서도 인사말도 없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가는 예외적인 아이도 간혹 있기도 하지만~ㅎ  

이렇게 환하게 아침을 맞이해주는 아이들의 미소와 목소리는 정말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복잡한 도로의 차량 매연과 미세먼지를 푹 덮어쓰고 있지만, 내게 이를 충분히 보상을 해주고도 남는다.


'명실상부' 란 말이 있다. 이름과 실상이 상호 부합되면 최상이겠지만, 아이들의 이름은 몰라도 밝고 환한 그들의 미소와 목소리는 오래 동안 내 마음에 기억될 것이다. 

이름은 허상일 테이고,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목소리는 실상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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