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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당 Jul 09. 2021

대가족의 가치

늦은 봄날까지 등, 하교 때의 교문 앞에는 학부모들이 늘 북적이게 된다. 1학년 아이들이 입학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학부모가 아이 손을 잡고 함께 오고 가기 때문이다. 

    

교통 지도하는 사거리 교차로에 서 있으면,  아이들이 어느 방향에서 몇 시쯤 오게 되는지, 데려다주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누구인지 저절로 익혀지게 마련이다. 내가 서있는 교문 앞 지점과 대각선 방향의 건널목에는 항상 일정 시간에 1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건너온다.

초록 신호등이 켜지면, 그중 갓 입학한 1학년생과 2학년생 4~5명이 선두로 뛰어오면서 밝고 큰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그 뒤로 3, 4학년생과 고학년생들도 인사를 하며 천천히 건너온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똑 같이 많은 아이들이 함께 건너오기에 나는 궁금하기도 하여 얼마 전에 물어보았다.

"너희들 왜 늘 같이 오니?, 이웃에 살고 있니?" 하고 물었더니, 그중 초록색 안경 낀 1학년 여학생이 

"우린 대가족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에도 이렇게 대가족을 이루어 조부모 밑에서 3~4대가 함께 사는 집이 있구나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결혼한 자녀들을 함께 모아서 손주들과 한집에서 살고 있으며, 자녀 또한 분가하지 않고 한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형제자매끼리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구나 하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 

한편으로 그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면서 더욱 다정하고 친근감을 갖고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초록색 안경을 낀 아이는 말하는 게 똘똘하다. 교문에 서있는 내게 뛰어와서 친구가 계단에서 떨어진 뉴스를 재빠르게 전하기도 하고, 내게 

"뭐라 부를까요, 할아버지로 불러야 할까요?"

"그래, 너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면 된다." 하면, 

"할아버지 겨자 소스 드실 수 있어요?" 하며 방과 후 수업에서 만든 요리를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 와~ 구절판 만들었구나! 누구와 먹을 거니?" 

"에~(한참 생각하더니) 엄마와 먹을 거예요." 

"다음번에는 요리 많이 하여, 내게도 좀 주려무나."

 "예~ 할아버지!" 하며 신나게 집으로 달려간다.     


키 작은 2학년 여학생은 하교 길에 내게 물어본다. 

"혹시 보라색 가방 멘 1학년 여자애 갔어요?"  내가  

"누군지 몰라 자세히 못 봤는데." 하였더니, 다음 날 아침 등교 길에 키가 자기와 똑같은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애가 내 동생인데 이런 보라색 가방을 메었어요." 하며 내게 알아 두라는 듯이 말을 하고 간다.     

마치 동생을 잘 돌보기 위한 사명감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았다. 늘 손을 잡고 길을 건너왔으며 혼자 올 때는 동생이 지나갔는지 반드시 내게 확인을 하곤 했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교내에서 순찰을 돌면서도 그 얘들이 보이면 가까이 가서 얘기를 붙이며 차츰 친하게 되었다.     

1, 2학년 여자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대부분 줄넘기를 하며 놀고 있으며, 나는 다가가서 "야, 너 많이 늘었구나." 아니면 "가위 뛰기, 묵찌빠 뛰기, 이단 뛰기 등을 할 줄 아느냐?" 등을 물어보기도 한다. 

키 작은 자매도 줄넘기를 즐겨하는데, 나를 발견하면 멀리서 뛰어와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고 몇 번을 뛰게 되는지 내가 소리 내어 헤아려 주기를 원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아이들의 요청으로 내가 줄을 길게 늘여서 돌려주는 헬리콥터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주변의 남녀 아이들이 몰려와 함께 뛰어넘으며 즐거워하는데 가장 인기가 있는 게임이다.


진지한 언니와 달리 1학년 동생은 심술이 많은 장난꾸러기이다. 

나는 교내에서 이른 봄까지 귀를 덮는 빵모자를 쓸 떼도 있는데, 방한도 잘되고 무엇보다 나의 흰머리를 감춰주게 되어서 자주 쓰고 있다. 

하루는 동생이 줄넘기를 몇 번 하는지를 세어주고 있는데, 줄넘기를 하다 말고 나를 보더니 "아저씨 고개 한번 숙여보세요."라고 하기에 머리를 숙였더니, 내 머리에 쓴 빵모자를 순식간에 벗겨 들고 자기 교실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민망함을 감수하고 교실로 들어가 담임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찾아온 적도 있다. 


한 번은 하교 교통지도 때 내게 오더니, "아저씨, 저 두 달 후에는 언니와 함께 전학 갈 거예요." 한다. "그래, 섭섭해서 어떡하지." 하면서 그 이후에도 가끔 물었더니 6개월이 지나도 그대로 다니고 있다. "전학은 언제 가게 되니?" 물으면, 난감 해 하면서 또 1년이 지나면 진짜 가게 될 것이고 한다. 요즘의 일상이 지겨운지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가 보다! 


자매는 등교 시에 00 문구에 자주 들러서 과자 등을 사 먹는데, 가끔 내게 과자를 건네줄 때도 있다. 처음 받았던 그 별 모양의 과자는 속이 젤리처럼 연한 새콤달콤한 맛이었는데, 그 후에도 나는 가끔 얻어먹게 되었다. 별 과자를 처음 내게 주었을 때 사양을 했으나 나도 어느 듯 이 맛에 길들여졌는지, 또 과자를 먹은 후 마시는 프림 커피 맛도 더욱 좋기 때문에, 요즘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정도로 새콤한 맛에 중독이 되었나 보다.

'모든 뇌물은 대가성이 있듯이' 그 과자의 대가로 나는 언니로부터 늘 "동생 갔어요?" 란 물음에 정확히 대답하기 위해 동생의 움직임을 늘 면밀히 살펴보아야 했다.     


또 다른 앞니가 귀엽게 빠진 여자아이는 등교를 하자마자 다시 가방을 들고 나온다. 이모와 병원에 가야 해서 선생님께 조퇴를 맡았다고 한다. 이 아이도 하교 때마다 내게  

"보라색 가방 갔어요?"  "핑크색은요?"  "안경은 갔어요?"며 친구들 동태를 자주 묻곤 했으며, 혼자 집까지 가기가 어려워 내 전화를 빌려서 이모와 통화를 하여 이모가 데리러 오기도 한다. 

언젠가 방가 후 수업을 마치고 수업시간에 요리한 빵을 먹으면서 나오더니 내게도 한 조각을 내민다. 

"할아버지 이거 드세요."

"응 그래, 나는 점심 후 양치질하고 나면 그 뒤에는 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절대로 안 먹는데, 네가 주는 거라서 특별히 하나만 먹어볼게." 하고서 집어 먹어보니 정말 맛이 있다.

"야 정말 맛있구나, 네가 만든 거 맞니?"

"그럼요. 건데 할아버지, 이거 제목이 뭔지 아세요?"

"빵이겠지."

"땡! '파이'예요."

"진짜 이름은 긴데 뭔지 아세요. 여섯 글자예요?"

"그래~ 맛이 '애플파이' 같기도 한데!"

"그것도 땡! '사과애플파이'~ㅎㅎ."


1학년 남자아이 두 명도 늘 함께 붙어 다니는데, 한 번은 그중 한 아이가 혼자 집에 갈 수 없다며 내 전화로 이모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함께 다니는 친구가 뒤따라 와서 자기가 같이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너 네 집이 같으냐?” 물어보니, 같이 산다고 대답을 한다. 가끔 싸우지만 활발하게 단짝으로 잘 다니고 있다.     

6월이 되면서 나와 함께 일하던 안전지킴이 동료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고 새로운 사람이 왔다. 한 번은  내가 이 아이들과 관련하여 대가족으로 산다며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 지역 공무원 출신인 새 동료가 00 아파트 뒤에 '어린이집'이 있어 아이들이 함께 사는 것일 거라며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아차 하며 '우린 대가족이에요' 라며 함께 오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나 자신이 궁금하다고 함부로 물어보는 것도 누군가에게 가슴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 병원에 함께 가고 하교시간에 맞추어 가끔 데리러 오는 이모님이 친 이모님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시는 분이란 걸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밝고 구김살 없이 예쁘고 당당한 아이들이다. 부모 대신 어린이집 원장을 비롯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이었다. 인사 잘하고 친절하고 주변과 잘 어울리는 그 아이들이 웬 지 두텁고 믿음직하게 보이는 것이 핵가족 시대의 허전함과 외로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의 어릴 적 시절이 생각난다. 방학이 되면, 멀리 떨어진 큰 아버지 집과 작은 아버지 집으로 기차와 버스를 연이어 타고 와 방학 내내 사촌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재미있는 경험과 많은 추억을 쌓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중 3 때는 시골에서 부산으로 맨 처음 전학을 와 할머니가 계시는 작은 아버지 집 채 3평도 안 되는 방에서 책상 하나로 사촌형제들 6명이 함께 지냈던 시절이 떠오른다. 작은 아버지 집은 전체 방이 3개였는데 나머지 방 하나는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 내외, 또 한방은 사촌 누나 3명이 복잡하게 지냈던 것이다.


지금 그 4촌 형제들 모두 원만하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점과 사촌 간에도 친형제처럼 각별히 잘 지내고 있는 것도 나름 어릴 적의 '대가족제'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뒤섞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원초적인 향수가 아닐는지. 그 속에서 참된 삶과 인간적인 유대감이 이루어질 것이며, 봄날의 꽃잎처럼 형형색색의 추억도 예쁘게 영글어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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