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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Oct 13. 2022

안 돼! 하지 마! 는 왜 이렇게 힘이 들까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현진이가 처음으로 기관에 다니기 시작한 네 살, 같은 반 친구가 한동안 유독 현진이만 때리거나 미는 일이 있었다. 나쁜 의도로 때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아직 표현이 미숙한 네 살 아가들은 신이 나거나 흥분하면 의도하지 않은 공격성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몇 달간이나 계속되는 '오늘도...'라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그 친구에게도 화가 났지만, 사실 내 속상함과 울분의 가장 큰 원인은 현진이었다.


현진이는 예쁜 말을 잘한다. 가끔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문장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말들은 도대체 어디서 학습된 것일까 매번 궁금해진다. 내가 예쁜 말만 쓰는 사람이 아니고 고운 말만을 강요한 적 또한 없다 보니, 나는 그것이 현진이의 천성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성격이 본인의 억울함이나 분노를 표현할 때도 어김없이 발현된다는 데 있다. 누군가 때리거나 밀거나 화가 나게 하면 확실하고도 강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심지어 울지도 못한 채 멍해져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누군가 현진이의 마음을 알아봐 주면 그제야 말이라도 해지만, 그 누구도 미처 현진이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냥 혼자 속상한 마음을 꾹 참고 넘겨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한 수많은 속상함과 분노가 현진이 마음의 약한 부분을 야금야금 먹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현진이의 지나치게 무른 마음이 삼켜버린 나쁜 감정에 자리를 내어주다 결국은 딱딱해지지 않을까 늘 걱정하고 고민한다.




그저 당하고만 있는 현진이의 성격이 그래도 자라면서 많이 나아지는 중이라고 생각해왔건만, 오늘 현진이는 나의 믿음을 와장창 깨뜨려버렸다.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하던 중 현진이가 실수로 축구공을 잘못된 방향으로 찼는데, 뒤따라오던 친구가 현진이의 실수에 화가 치밀었는지 느닷없이 현진이의 팔뚝을 주먹으로 세게 두 번이나 내리치더니 휙 돌아 달려가버렸다. 너무 순식간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현진이도, 멀리 서 있던 나도 멍하니 서 있었다. 때린 친구의 엄마가 급하게 달려가 현진이를 안아주기 직전의 그 순간, 나는 현진이가 속상함을 꾹 참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힘이 쭉 빠진 몸으로 다시 친구를 따라 달려가려는 그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화를 내야지! 왜 때리냐고 큰소리쳐야지! 그것도 아니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기라도 해야지! 다시 웃으려고 노력하면서까지 너를 때린 친구에게 가서 놀려고 한다고? 너를 때린 것쯤은 아무 잘못이 아니라는 듯이? 아팠잖아, 속상했잖아! 바보니? 호구야?


내 마음에선 땅이 흔들리고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리고 사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현진이에게 마음속으로 한참 동안이나 야단을 쳐댔다. 나는 불 뿜는 용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가며 현진이를 잘 달래줬고, 친구와 친구의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사과했고,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에서 현진이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너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의 공격에 너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확실하고 강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정도로 끝을 냈다. 현진이가 잠시 동안 내 눈치를 보더니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싶다는 신호를 주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창피하거나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서일까,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억지로 연습시킨 '하지 마!'라는 말이 여전히 현진이에겐 버거운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현진이가 맞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그날부터 차라리 현진이가 맞는 쪽이 아니라 때리는 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왔다. 나는 매번 맞고도 가만히 있었던 현진이에게 '하지 마!'를 말하도록 다그치듯 가르쳤고, 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현진이는 마치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주눅이 들곤 했다. 울분을 참을 수 없어 그렇게 현진이에게 쏟아내고 나면 나는 아이의 상처를 안아주지 못하는 나쁜 엄마가 되었고, 나쁜 엄마를 둔 현진이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자는 현진이를 바라보며 죄책감이 들어 미안하다 눈물짓는 밤이 수없이 많았다. 차라리 내 아들이 잘못이라도 한 거였다면, 내 아들이 혼나는 게 당연한 거였다면, 우리는 덜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현진이는 나에게 아주 끔찍한 존재다. 어느 날 악마가 나타나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내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노라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다. 현진이의 몸과 마음에 요만큼의 상처도 용납할 수 없는 건, 그 누구라도 내 새끼를 함부로 대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건, 그래서다. 사랑하니까.


그래도 아무런 잘못 없이 당하기만 한 현진이를 다그쳐서는 안 됐었다. 오늘 차 안에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현진이의 시그널을 본 순간, 현진이가 나에게마저 본인의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 마음을 꽁꽁 감춰버리는 날이 올까 문득 두려워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마치 네 잘못인 것처럼 무서운 눈을 하고 '하지 마'라는 말을 연습시키지 말아야지. 네 마음에 상처가 쌓이지 않게 내가 더 많이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낫게 해 줘야지. 더 이상 후회의 밤을 만들지 말아야지. 오늘도 나는 후회하고야 말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한다.


현진아,

나는 너의 예쁜 마음과 예쁜 말을 아주아주 사랑해.

너는 그 누구보다도 예쁘고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우리 차근차근 느릿느릿, 현진이가 힘들어하는 그 말들을 연습해보자.

너의 예쁜 마음이 오래오래 상처 없이 예쁠 수 있도록, 강인하고도 부드럽게 소중한 너 자신을 지켜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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