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동생과는 연년생이다. 어릴 때 쌍둥이 같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몸이 약했던 동생과는 늘 친구처럼 바깥에서 놀기보다는 집안에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7년은 자매로 살았다.
사진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어릴 때 사진이 거의 없다.
내가 7살 때 학교 입학하기 전 특별한 사진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사진 속에 어린 내 모습은 훌쩍 자라 길이도 소매도 작아진 한복, 맨발에 구두는 챙겨 신고 그마저도 동생은 왼발 오른발이 바꿔 신은 신발, 나의 오른손은 동생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관에서 준비되어 사진 찍은 모습이라고 하기 에는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사진이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영화 필름처럼 생생하다.
성질 급한 아빠의 손에 이끌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나선 종착지는 바로 사진관이었다. 사진관 안에서는 사진사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둘이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손을 잡아라 아니다 손 잡지 말아라, 사진사 아저씨의 말과 아빠의 요청으로 우리 둘은 난생 처음 찍는 사진에 긴장하며 있었다.
엄마가 준비했더라면 좀 더 예쁘게 머리도 하고 옷도 예쁘게 입히고 신발도 잘 준비해서 촬영 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사진을 바라봤던 사춘기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그 사진이 유일하게 찍은 나의 어릴 적 소중한 사진이 되었다.
지금은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미 충분 감사한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어릴 때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사진관에서 유난히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늘 성격이 급하고 당신이 원하는 데로 안 되면 욱 하는 성질을 무서워했다. 늘 그런 모습은 어린 나에게는 공포감이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우린 아빠랑 있으면 항상 긴장의 최고조 상태가 되곤 했다.
그날도 분명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행동이 느리면 사람들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창피하게 혼을 낼게 뻔하다.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겁에 질려 울게 되면 그럼 우린 운다고 분명 혼나는 날이 된다.
그날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사진을 보면 역력히 나타나 있다.
기억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때 그 현장의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동생과 사진 찍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동생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은 긴장을 했던 게 느껴졌다.
나 때문에 동생이 혼나는게 무서워서 동생의 손을 잡아끌고 움직이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이 기억은 잊혀지지도 않는 것일까? 고작 7살정도 되는 나이인데도 생생하다.
그 어린나이에 눈치를 보게 하고 공포심을 갖게 했던 아빠가 밉고 싫었다.
이 밉고 싫었다는 것도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표현하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안에서 아빠의 비유를 잘 맞춰야 하는 딸 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집에 가서 친구의 아빠를 보거나 친구 집의 분위기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아빠와 자녀들과의 관계가 너무 다른 아빠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더 우리 아빠의 거침없는 언행과 행동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삐뚤어진 남성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남편과 연애를 하며 결혼을 했다. 시아버지께서 자녀를 대하는 모습 그리고 나의 남편이 자녀들에게 하는 모습과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려왔다.
비록 아버지는 따뜻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남편을 만나서 나의 상처와 두려움이 온유함과 평온함으로 보상받고 치유되는 안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나의 자녀들에게 평안과 안전하고 사랑받는 공간이 되어 주는 곳이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더 컸었던 같다. 어쩌면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부어주고 싶어 너무 과한 사랑이 표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해본다.
나의 어린 시절의 결핍에서 오는 사랑을 온전히 채워주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조금은 거칠고 뾰족함으로 다가갔을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상처나고 아픈 마음을 돌아보며 부모로써 성장해 한 인격으로 성숙되어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