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 나가는 균형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하죠.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저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들의 ‘알고리즘’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오늘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보다 균형 잡힌 선택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유튜브나 SNS는 ‘알고리즘’을 통해 내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더 자주 노출시키고, 반대로 선호하지 않는 콘텐츠는 점점 덜 보여 줍니다.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 형성되는데요. 필터 버블이란,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어 다양한 관점을 접하기 어렵게 하고, 비슷한 생각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미 나의 기존 의견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계속 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이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는 곧 확증 편향을 강화시켜, 어떤 문제에서 나는 균형 잡힌 올바른 판단을 하였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균형적이지 않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높이게 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고리즘이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양극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편향을 빠르게 확대하고 강화시켜 우리가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기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럼 이런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까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中庸)’이라는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중용은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수학적 중간값을 뜻하는 것은 아닌데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 속에서의 ‘적절함’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부족하면 비겁함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태도가 바로 중용인 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중용은 수학적 평균이 아닌 맥락에 맞는 최선의 판단입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성적 판단의 ‘적절함’입니다.
중용에 맞게 사는 삶은 곧 덕 있는 삶이며, 결국 행복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내리는 균형 잡힌 선택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확신이 중요합니다. 중용을 따른다는 것은 그저 눈치를 보며 무난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과 뜻을 분명히 세우고, 주변의 말이나 흔들리는 여론에도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지니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기 확신을 갖는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을 100%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럴 때는 이런 문장을 속으로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너를 믿는 나를 믿어.” 이 말은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 주인공의 형이 주인공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건넨 대사입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백강혁 교수가, 처음으로 혼자 집도를 맡게 된 양재원 펠로우에게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전하며 오마주 되기도 했죠. 짧지만 강력한 이 한마디는, 자기 확신이 흔들릴 때 다시 균형을 잡게 해주는 작은 중용의 실천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어주는 동료나 가족, 스승의 시선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보내준 신뢰를 빌어 잠시나마 나에 대한 확신을 세워보는 것이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역시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그 편지의 일부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 작은 위로와 용기를 얻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건, 네가 실제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면 그 문제의 크기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네가 자신을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했지. 하지만 너는 네 아내와 아이에게는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동료들이 네게 질문을 하러 찾아왔을 때 답을 줄 수 있다면, 곧 너의 주변에서도 이름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나에게도 너는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야. 자신을 그런 식으로 여기지 말아 줘. 젊을 적 네가 가졌던 순진한 이상이나, 선생님의 기준을 잘못 짐작해 만든 잣대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너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해 주길 바라.
행복과 행운을 빌며, Richard P. Feynman
편지의 원문 링크. http://genius.cat-v.org/richard-feynman/writtings/letters/proble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