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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더 어려운 것들

‘지식의 저주’와 창의성의 역설

by 들여쓰기


디자인을 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디자인을 열심히 공부했으니, 그만큼 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디자인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배우고 노력하면 실력이 느는 게 당연한 일인데, 왜 디자인은 알면 알수록 자신감이 줄고,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빠지기 쉬운 ‘지식의 저주’라는 인지적 함정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오히려 창의성이 방해받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창의성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 일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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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때

혹시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는 개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식의 저주’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어려워지는 인지적 편향을 말합니다. 교육, 마케팅,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인데, 디자인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수백 개의 폰트를 구별할 수 있고, 자간 0.2pt 차이까지 민감하게 알아채는 디자이너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미세한 차이는 당신에게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 정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더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작업물을 세심하게 다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디테일이 일반 사용자에게는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사용자 관점에서 디자인을 다시 바라보는 겸손함입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AI보다 창의적이다?

최근 몇 년 사이 AI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클릭 몇 번이면 영상이 만들어지고, 광고 배너도 금세 완성됩니다. 이런 세상을 바라보며, 디자이너로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AI가 참 잘하긴 하네. 그래도 창의적인 부분만큼은 인간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알파고와 대국을 펼쳤던 이세돌 9단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어릴 적 기원에 다니며 ‘이 위치에 돌을 두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을 받습니다. 결국 그런 학습들이 쌓여, 하나의 틀 안에 갇히게 되죠. 하지만 AI는 그런 고정관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창의성이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디자인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디자인 규칙과 기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의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정말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는 경우는 점점 줄어듭니다.




선택적으로 잊는다는 것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는 더 많은 기준과 정답을 갖게 됩니다. 그 정답들은 때로는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도구’가 되지만, 동시에 창의성을 제한하는 ‘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의 지점에서 일본의 언어학자 도야마 시게히코의 통찰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는 『사고정리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망각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잊고, 무엇을 남길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개성이 형성된다.” 이 말은 단순히 ‘기억력이 안좋아도 괜찮다.’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의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망각, 즉 ‘잊는 선택’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적으로 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래 내용들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기억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잊을 것인가’

우리는 종종 모든 걸 기억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도야마는 말합니다. 생각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모든 걸 기억하려고 애쓰기보다, 불필요한 정보를 비워내고 핵심을 남기는 사람이 오히려 더 명쾌하게 사고할 수 있습니다. 그 여백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연결, 창의적인 조합이 가능해집니다.


2. 개성은 기억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강의를 들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내용들이 다 다릅니다. 무엇을 기억할지, 무엇을 잊을지에 대한 선택의 차이가 사고방식의 차이가 되고, 사고방식의 차이는 곧 개성이 됩니다. 사고의 독창성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쌓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를 어떻게 걸러내고, 어떻게 구조화하느냐에서 비롯됩니다. 개성이란, 기억의 양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 의도적 망각은 창의력의 촉매다

정보는 넘쳐나고, 정답을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시대. 하지만 정답을 아는 것과 정답에 갇히지 않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대로 따르고, 누군가는 그 너머를 상상합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의도된 망각입니다. 모두가 붙잡고 있는 기준 중 일부를 과감히 잊고 실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만의 해석’이라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식은 디자이너에게 매우 강력한 무기입니다.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고, 설득력을 높여주는 든든한 자산이죠. 하지만 때로는 그 지식이 나를 제한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는 점, 오늘 이 아티클을 통해 한 번쯤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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