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마이클 샌델과 함께 100m 출발선에 서다
우리는 흔히 스포츠를 ‘가장 공정한 경쟁의 장’이라고 추앙합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불공정이 판치는 사회와 달리, 하얀 라인이 그려진 트랙 위는 투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부모님의 재력도, 출신 학교의 간판도, 사회적 지위도 잠시 힘을 잃습니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과 두 다리의 근육만이 결과를 증명하는 세계. 그래서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합니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마치 종교적 구원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공정해 보이는’ 출발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살피면, 미세하지만 거대한 균열이 감지됩니다. 과연 100m라는 거리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100m일까요?
미국 국기를 달고 선 근육질의 선수는 기록 단축을 위해 설계된 탄소 섬유 러닝화를 신고, 엘리트 코치에게 과학적인 주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의 근육은 어릴 때부터 섭취해 온 질 좋은 단백질과 영양제로 다져져 있습니다. 반면, 바로 옆 레인에 있는 이름도 낯선 아프리카 출신 선수는 아르바이트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닳아빠진 운동화를 신은 채 출발선에 섰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두 선수가 동시에 튀어 나갑니다. 결과는 냉정합니다. 우리는 승자에게 “노력의 결실”이라며 박수를 보내고, 패자에게는 “노력이 부족했다”라고 훈계합니다. 결과가 과정의 모든 불평등을 정당화해 버리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과연 ‘공정한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던진 묵직한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능력주의는 “기회가 평등하다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심리적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나의 성공이 오로지 나의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면,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의 가난과 좌절 역시 전적으로 그들의 무능과 나태함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샌 델은 이것을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고 표현합니다. 스포츠 스타가 “나는 내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수많은 행운—부상당하지 않은 신체,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시대적 환경, 부모의 지원—을 망각하게 됩니다.
스포츠는 어쩌면 이 잔인한 능력주의를 학습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일지 모릅니다. “Just Do It(그냥 해라)”이라는 슬로건 뒤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유전적 복권’과 ‘환경적 격차’가 교묘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승자에게 환호하며 그가 가진 배경의 유리함까지도 그의 ‘실력’으로 포장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이클 샌델이 정신적 오만을 지적했다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우리의 ‘몸’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그는 저서 <구별 짓기>를 통해 개인의 취향과 신체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혀냅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특정한 환경에서 길러지며 몸에 배어버린 성향이나 습관을 말하는데요, 부유한 계층에서 자란 아이는 어릴 때부터 테니스나 승마, 골프 같은 비용이 많이 들고 매너를 중시하는 스포츠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곧은 자세와 여유로운 태도를 익힙니다. 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은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는 맨몸 운동이나 거친 격투기, 혹은 축구 같은 대중적인 스포츠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즉, 부모의 경제적 자본은 자녀의 ‘신체 자본’으로 전환됩니다. 무엇을 먹고,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느냐가 성인이 된 후의 키, 체격, 피부 상태, 심지어는 걷는 자세까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운동하면 다 똑같이 땀 흘리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지만, 사회학적 시선으로 보면 골프장의 땀과 공사장의 땀은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출발선에 선 두 사람의 몸은 이미 그들이 살아온 ‘계급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셈입니다. 100m 트랙은 평평할지 몰라도, 그 위를 달리는 몸들은 결코 평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한 운동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은 어차피 기울어져 있으니 노력할 필요 없다”는 냉소주의에 빠져야 할까요? 아닙니다. 스포츠의 땀방울은 여전히 가치 있고,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숭고합니다. 다만, 우리는 승리와 패배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진정한 스포츠맨십은 룰을 지키는 것을 넘어, ‘나의 승리에 운과 환경이 작용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남보다 앞서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더 잘나서가 아니라 내 발에 더 좋은 신발이 신겨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샌델이 말한 ‘운에 대한 겸손’입니다.
또한, 뒤처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저 불운한 출발선에 섰거나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을 뿐임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진짜 출발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테니까요. 이처럼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단순히 강한 몸을 만드는 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등이 꼴찌를 조롱하지 않는 사회, 꼴찌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경기. 나의 성취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넘어진 동료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여유. 그것이 결코 평평하지 않은 이 세상이라는 운동장을, 그래도 함께 달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