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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자세 (2편 완)

by 그루터기

재진형과 나는 서로의 휴가 일정을 늘 사전에 조율했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휴가 중복등으로 인한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휴가 중인 오늘 오후엔 재진형은 자신이 항암치료를 마친 후 병상에서 회복을 위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톡으로 보내왔다. 자신이 복귀하는 다음 근무일엔 자신이 맛있는 점심식사 한 끼를 대접하갰겠노라는 약속을 덧붙였다.


재진형은 본인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날엔 3인 식사모임과는 별도로 나와 형과의 양자 모임을 마련하곤 했다. 서로는 보다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터놓는 자리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맛집 선정은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이 근처에서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이어갔던 내 경력을 인정해 준 셈이었다.

“최작가, 지금 반장이 이곳에 들렀다가 그쪽으로 가고 있어”

반장에게 혹시 작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게 내게 소소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저쪽 조 반장과 달리 우리 조 반장은 독특하게도 ‘야간 점호시간’을 마련했다. 주간 업무가 마감된 후 경비대원들은 업무일지를 겨드랑이에 껴고 반장초소로 몰려들었다. 이곳엔 평소 외부 방문자나 다른 경비대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보조의자가 충분히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원들은 더러는 보조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더러는 벽에 기대 선채로 반장의 훈시에 귀를 기울이는 진풍경이 매일 초저녁에 벌어졌다. 여기서 반장의 이야깃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신은 오늘도 자진하여 청소를 열심히 했고 다른 초소의 대원일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등 자기 사랑 내지 공치사가 주를 이루었다. 이에 더하여 이곳 점호시간에 반장초소에 출석하지 않은 다른 대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언제 마칠지 모르는 이 비공식 일석점호에 예의상 일정한 시간 머물렀다. 그럼에도 나는 경비일지를 건넨 후 내 초소로 곧장 돌아오곤 했다. 이러다 보니 재진형은 내가 없는 동안 점호시간에 회의 참석자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내게 고스란히 건네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오후엔 내 초소에서 반장과 재진형과 조우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유제품 음료 하나를 반장에게 얼른 건넸다.

“아니, 이렇게 좋은 것을 내게 주다니, 잘 먹겠습니다.”

나는 평소 반장에게 이런저런 간식거리등을 건네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나는 반장에게 조그만 것 하나라도 받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반장은 남에게 조금이라도 베풀지 못하는 캐릭터였다. 내가 보기엔 이런 반장의 리더십은 낙제점을 넘지 못했다. 정말로 특이한 족속이었다. 가끔 대원들이 점심식사 오퍼를 먼저 낼 경우엔 자신은 절대 누구에게 식사비를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해서 이어갔고 대원들이 먼저 꺼낸 식사자리 제안에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반장님. 연세에 이렇게 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살이 찌지 않은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대단히 건강하십니다.”

이런 나의 연출된 칭찬에 반장은 순간 으쓱해하기도 했다.

“재진형, 어제 제가 반장을 소쿠리 비행기 태운 것은 어땠나요?”

“아주 괜찮았어, 칭찬으로 위장한 아부였지.”

이럴 때도 재진형은 내게 추임새를 넣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재진형은 언제나 내편이었다.

“어제 병원을 다녀왔는데 교수가 깜짝깜짝 놀라더구먼, 힘든 치료를 잘 버티고 있고 전보다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나 같은 4기 암 환자는 5년 이상 생존율이 20% 정도라는데 나는 이제 4년 차에 들어서고 있어... 지난번 최작가가 내게 보내준 신약정보도 미국에 있는 아들이 검토하고 있는 중이야.”

오늘 점심 고등어조림집 3인 식사회동에서 재진형은 최근 자신의 형편에 관해 우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제법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에서 1년여간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귀촌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재진형이 내 초소 교대근무자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최작가, 지금 처지에 관해 너무 자학하지 말게나, 그 정도의 인생도 성적이 그리 나쁘건 아니야 . 나는 이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리거든. 모쪼록 귀촌하더라도 계속 연락하고 지냅시다.”

내가 이곳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재진형은 컨디션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바람에 나보다 약 6개월 후에 극한직업 현장생활을 마감했다. 이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여기서 병상생활은 여러 가지 제약이 많으나 좋은 치료법이 제안되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

건강상 이유로 일자리를 떠난 재진형은 자녀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작년 7월엔 가족단위 여행을 다니는 기행문도 내게 수시로 보내오곤 했다. 최근 스웨덴에서 개발한 새로운 치료법의 혜택을 보려면 1회당 무려 3억 원이나 필요했다. 그나마 완치를 담보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새해 들어 재진형은 미국에서 치료를 포기하고 귀국을 했다.

나는 새해 인사로 ”건강이 눈에 띄게 회복되는 새해가 되길 기도합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작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어요 하여튼 서울 올라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부탁합니다. “란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재진형이 나와 같이 삶의 현장에 있을 때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결국은 제가 죽일 놈아 된 거네요? 자아비판하겠습니다."

"항상 두 사람이 문제야 아무리 함박눈이 두껍게 쌓이더라도 우선 입주민들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통로를 내면 될 일이지, 쌓인 눈 전부를 모조리 깔끔하게 쓸어내서 나 같은 사람을 힘들게 만들면 어떡하란 말이야...”


재진 형의 체력을 감안하여 다른 대원들도 자기 구역이지만 낙엽이나 눈 청소를 하는데 다른 대원대비 눈에 뜨일 정도로 무리하지 않았어야 했다. 재진형의 작업 진도와 모르는척하며 슬그머니 어느 정도 맞추어야 했다. 재진형의 넋두리가 아직도 내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저쪽 무지개다리를 건너가더라도 전혀 미련이 없어.”

평소 재진형이 입에 달고 다니던 멘트였다. 그렇게 대단히 큰 병과 싸움하고 있음에도 어쩌면 저렇게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지 나로선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소식은 항상 불시에 일찍 전해지기 마련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난 3월 중순이었다. 재진형의 부고가 톡으로 도착했다.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한 후 얼굴을 한 번 보자고 한 재진형의 바람을 내가 들어주지 못했한 것이 작지 않은 한으로 남았다.

투병생활 중에도 극한 직업의 현장에 나선 일은 물론 무지개다리를 의연하게 건널 수 있다던 재진형의 자세를 나중애 나는 얼마나 따를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었다. 재진 형의 명복을 다시 한번 간절히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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