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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별곡, 자수성가한 사촌형

by 그루터기

“네가 원하는 꿈을 마음껏 펼쳐라 그토록 가고 싶었던 법대에 들어갔으니...”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 막 시작되었다. 나는 모처럼 고향에서 상경한 아버지를 모시고 왕십리 중앙시장 인근의 너른 포장도로를 지났다.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비탈길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엔 ‘왕도교회’란 간판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인구 일천만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일이 잘 믿기지 않았다. 도시 중심지의 번화한 거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중소도시의 빈민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풍경에 다름이 없었다.

발을 안심하고 디디기엔 폭이 좁은 수십 개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 고갯마루를 넘어섰다. 시인 이준관의 ‘천국의 계단’이란 작품이 떠오르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길 왼편 난간에 빛바랜 옅은 하늘색 목재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삐거덕 소리를 내는 이 문을 마저 안쪽으로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내 고종사촌 형님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가내수공업의 현장이자 살림집이었다. 외삼촌이 서울 오실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모시고 오라는 사촌형의 간절한 부탁을 내가 실천에 옮기던 순간이었다. 사촌형 내외는 우리 일행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고향에선 일찍이 ‘대목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고모부는 한량이었다. 슬하 2남 2녀의 사촌형님과 누님들 정규학교 교육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이름난 애주가로 널리 알려진 고모부는 언제든지 술자리만 마련되면 당신 본업인 목수일은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러다 보니 사촌 형님과 누님들은 우리 아버지인 외삼촌과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협의하고 결정하는 형편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사촌 형제들에겐 아버지가 명실공히 정신적 지주였다.

고향 시골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기호형은 고모부에게 인사는 건너뛰고 최근 무작정 상경하기로 자신의 막내 외삼촌인 우리 아버지의 허락을 이미 받아놓았던 터였다. 기호형은 아버지가 평소 입던 누런색 중고 화이츠셔츠까지 얻어 입었다. 훌쩍이는 모습을 애써 감추며 동구밖을 나서 기약이 없는 장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빈손으로 무작정 상경한 기호형은 주경야독을 몸소 실천했다. 사업밑천이라곤 전혀 없었던 기호형은 몸으로 때우는 밑바닥일부터 기초를 단단히 다지기에 나섰다. 낮엔 생계유지를 위해 생업에 몰두했고 늦은 밤시간을 쪼개어 책을 잡았다. 그리하여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무리까지 할 수 있었다.


‘기계’라 부르는 방직기를 가동하여 중간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요 일거리였다. 15명 내외의 일용노동자를 동원해도 부족하니 기호형 내외도 부지런히 일손을 보태야 했다. 이곳은 최종완성물인 옷 제작의 중간공정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자본금이 미천하다 보니 방직기를 외상으로 들여다 알뜰하게 모은 공임을 쪼개 기계값을 나누어 갚아 나가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 결과 온전한 소유권을 손에 넣은 기계 숫자가 점차 늘어났으며 일부는 임대 기간을 지나 점차 캐시카우로 돌아섰다.

빈손으로 가내공업을 시작한 형 내외는 그야말로 온몸를 갈아 넣어 점차 자산을 늘려갔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이제 어느덧 사업기반을 마련했다. 아버지에게 큰절을 드린 후 기호형은 초등학교를 마친 후 상경한 후 오늘 현재의 살림기반을 마련하기까지 피땀 흘린 여정을 세세한 부분까지 리얼하게 늘어놓았다. 형수님은 완성품인 옷가지를 머리에 이고 동네 방방곡곡을 누비는 보따리 행상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정도 살림기반을 마련하는데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사촌형과 누나들은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를 정신적 지주로 살아가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집안 대소사등 모든 고민거리나 현안에 관해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고 해결방안 등에 관해 자문을 구하는 것이 이제 이미 일정한 패턴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사촌형제들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소년 가장 역할을 떠안은 아버지가 취득한 노하우 등을 참고하여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사촌 형제들은 중간중간 아버지에게 일의 진행상황이나 진도, 애로사항에 관한 자문을 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 발로 뛰어 체득한 삶의 지혜 등을 아버지는 아낌없이 모두 사촌 형과 누나들에게 온전히 나누어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오늘도 아버지는 기호 형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과정을 겨우 검정고시로 갈음한 기호형과 견줄 때 나는 전혀 딴판이었다. 온전히 부모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서울 소재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으니 어쩌면 선택과 혜택 받은 사람이었다. 오늘 기호형은 자신보다 훨씬 풍족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네 꿈을 마음껏 펼치라’는 덕담은 안방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일렀던 첫마디였다. 부디 뜻을 크게 품고 잠시도 게을리하지 말라는 진정성 있는 충고와 응원의 메시지였다. 이렇게 우호적인 환경과 갖은 혜택을 받고 있는 나는 기호형에게 순간 무척이나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적인 여건 등 여러 형편으로 그렇게도 촌스럽고 남에게 내세우기가 부끄러웠던 소소한 일들이 이젠 내게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재탄생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고향에서 자주 쓰던 사투리며 옷차림 생활패턴 등이 누구에게 모두 당당하게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전혀 디지털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이었지만 거기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형제애, 친구들과의 우정, 사람 냄새나는 인간미, 가공되지 않은 날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 뙈기의 땅도 바다와 접하는 곳이 전혀 없는 내륙지방 분지 중 또 하나의 작은 분지인 내 고향에서 유년기를 지나 중학교시절을 마친 내게만 해당되는 일인지도 몰랐다.

오늘 사촌형 집 방문을 마치고 아버지를 모시고 대문밖을 나서는 내게 사촌형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일 만 원권 종이돈 2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거기다 외삼촌 내려가실 때 차비에 보태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왕십리에선 ‘비 오는 날의 수채화’ 풍경이 또 한 번 재연되고 있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오래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표제, 그 줄거리는 들어내고 영화에서 빌어온 이미지에 필자가 위에 적은 의미등를 보탠 뜻으로 사용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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