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현타가 밀려올 때, 후회에서 벗어나는 방법
작은 성취들
퇴사 후 몇 달은 아침에 쫓기듯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원할 때 산책을 할 수 있으며, 카페에 앉아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모든 일상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40대라는 점에서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친구나 동료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위축되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럴 때마다 의식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과거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퇴사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에 빠졌어요. 공상과 망상에 가까운 생각의 끝에는 "괜히 퇴사했나?"라는 씁쓸한 후회만 남겨졌습니다.
방법은 현재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게 참 쉽지 않았어요. 지금의 나는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돈보다는 시간을 선택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억지로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나의 뇌가 그것에 더 익숙해질 테니까요.
그럴 때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은 퇴사한 이후에 성취한 걸 써보는 거였어요.
회사에 계속 다녔다면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것들, 시간의 자유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이요.
대단한 성취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간단히 이부자리 정리부터 시작했었고요. 매일 요가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매트부터 깔고 아침을 시작합니다. 매트 위에 올라서는 것 자체가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생각으로.
1년전부터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어요. 2023년 말에 호주 여행을 갔는데 온 가족이 영어 울렁증이라 패키지로 다녀왔거든요. 근데 뭔가 답답하더라고요.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버스에서는 잠만 자고, 단체로 예약한 식당에만 가고, 자고 일어나면 전날 갔던 장소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유여행을 목표로 영어 회화를 시작했습니다. 아장아장 베이비 수준이지만 즐겁습니다. 아직 습관처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포기는 안 하고 있어요.
근데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중도포기 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습관처럼 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거든요. 때로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잠자기 직전에 멱살 잡고 하는 날도 많아요. 직장인이었다면 일하다 지쳐서 이런 의지가 꾸준히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물론, 직장 다니면서 자기 계발까지 해내시는 분들 리스펙 합니다.
그림도 배웠어요. 문화센터에서 제가 제일 어린 편이라 여사님들한테 인기 만점이었답니다. 그때 간접적으로나마 60대 시니어분들의 여가 생활에 대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진짜 바쁘시더라고요. 운동, 그림, 합창단, 악기, 종교 활동, 각종 모임 등 스케줄이 꽉 차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 똑같았어요.
"나는 앞으로 길어야 20년인데 자기는 40년은 그릴 수 있잖아.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해서 아쉬워."
은퇴 생활을 일찍 시작한 덕분에 취미 활동도 이른 출발 선에 서게 된 거예요. 돈 대신 선택한 시간이 이런 보상을 주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일기도 매일 썼습니다. 가끔 인생이 후회되고 남과 비교하는 똥덩어리 같은 마음이 올라올 때 들춰봐요. 내 감정과 생각이 살아 쉼 쉬는 공간이기에 오롯이 나를 향한 위로를 줍니다. 다시 답을 찾고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힘을 얻더라고요.
더 이상 옷도 사지 않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쇼핑앱에 들락날락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회사 스트레스를 거기에 다 푼 것 같아요. 1년 동안 100벌 이상 산적도 있어요. 사고 반품하고 또 사고...(변태냐?) 그러다 퇴사를 계획하고 미니멀리즘을 삶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 서서히 줄일 수 있었습니다. 계속 다녔다면 전 여전히 쇼핑앱에서 허우적허우적 대고 있었겠죠?
아 그리고 요리가 있네요. 요즘은 요리의 참맛을 느끼고 있어요. 그동안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전 또 김치...
이제는 레시피만 보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칼질도 서툴고 요리하나에 3박 4일 걸릴 기세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만들 수는 있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족들이 잘 먹어줘서 뿌듯해요. 제대로 돠 요리 하나로도 오늘 하루 잘살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김치요리에서 벗어났거 맞겠죠?
10대 아이들과의 대화 시간도 많아졌어요. 때로는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 그러나 아직은 불완전하죠. 이때야말로 부모가 건강한 삶의 가치관과 문화적 자산을 물려줄 수 있는 골든타임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 제가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내손으로 요리 하나 못 만든 채 할머니가 되었을 거예요. 젊은 날에 그림 시작 못한 걸 아쉬워했을 테고, 영어도 못해서 해외여행은 패키지만 선택했을지 몰라요. 옷장은 계속 터지고 있었겠죠. 집안 꼴이 어지러운 건 말해 뭘 하겠어요. "난 돈 벌잖아, 다 이렇게 사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더 나이 들어 툭 세상 밖으로 던져졌을 때 무턱대고 먹기만 한 '나이'에 괜한 화풀이를 했을지도 몰라요. (40대 이후의 나이는 먹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거의 흡입하는 수준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 시행착오도 많고 후회도 많았지만 다시 일어나기에도 딱 좋은 나이라 다행이에요.
퇴사 후에 현타가 세게 밀려온다면 이처럼 퇴사 덕분에 성취했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세요. "나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라고 느끼게 되더라고요. 오늘 제가 찾은 해답은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