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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Nov 30. 2021

25년 만에 눈썹을 안 깎아 봤다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간다는 것

몇 년 전 일자형 눈썹이 유행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눈썹산이 있는 아치형보다는 좀 더 앳되고 부드러워 보이는 느낌이 있었고, 아이돌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복숭아빛, 살구빛의 과즙 메이크업과도 찰떡이라 20대 젊은 여성들은 너도나도 일자로 변신했다.


나는 30대로 상큼한 메이크업과는 이미 몇백 광년쯤 멀어진 시기였지만 동안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망설임 없이 눈썹산을 밀어버렸다. 한 가닥씩 다시 모공을 뚫고 자라나기 시작하면,  밀어서 일자에 가까운 둥근 모양을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처음 만난 사람들은 항상 실제 나이보다 몇 년씩 어려 보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실은 왜소한 체구 덕일 수도 있고 의미 없는 인사치레일 수도 있으나, 어려 보인다는 말은 아무래도 좋다).

눈썹산(눈썹山) : 눈썹에서 가장 높게 올라간 부분. 눈썹을 그릴 때 중요한 부분으로, 눈동자의 바깥쪽 연장선과 눈썹의 이마 쪽 바깥 점이 만나는 부분을 기준점으로 잡는다.


그렇게 6-7년을 원래 눈썹산이 없었던 사람처럼 살았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눈썹 손질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학생이 화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던 시절, 매일 화장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학생부장 선생님의 꾸중을 이겨낼 만한 깡도 없었던 나는 순수한 얼굴의 모범생으로 지냈다. 다만, 눈썹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어봤다. 좀 더 날렵하고 샤프하게 깎아 나가며 획일화된 용모 복장 시스템 내에서 변주를 주고자 했다. 소심한 반항 아니 자기주장이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25년간 그 시기마다 유행하는 모양의 눈썹을 만들어왔다.


코로나가 터지고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집에만 있는 날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화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출근 준비를 했던 시간을 활용해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자전거 타러 나가기도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오거나 편의점에 들러 샐러드를 집어왔다.  


때로는 느긋한 아침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 잠시 일어나서 아이들 원격 수업 전에 먹일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고는 강아지 배를 쓰다듬으며 좀 더 쉬어봤다.


열심히 화장하고 기계처럼 출근하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한 한가로움과 여유가 있었다.


외출하거나 남편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땐 주로 모자를 썼다. 세안 후 로션을 바를 때조차 거울을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 눈썹 상태에 대한 관심은 더 멀어졌다.


재택근무 연속 3일과 주말이 이어질 경우에는 거의 일주일 만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이 돌아왔다. 머리를 말리고 기초화장을 하다 거울 속 내 모습에서 비로소 무질서한 눈썹과 조우했다. 박박 밀거나 뽑아버렸던 자리 밑에 숨어 있던 눈썹들이 하나둘씩 모공을 뚫고 나와 있었다.


눈썹 정리는 일상적인 정리정돈 습관과 같아서 자주 해두면 큰 시간을 들이지 않고 후딱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근 일주일을 방치한 눈썹의 사정은 다르다. 모발들은 자비를 잃고 제각기 다른 속도로 자란다. 더 빨리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던 애들이 여기저기에서 듬성듬성 자라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으니 군데군데 땜통도 보인다. 공들여 만들어놨던 일자형 눈썹은 어느새 형태를 잃은 지 오래고, 레이아웃을 다시 만들어 기초 공사부터 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이런 작업을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미봉책으로 삐죽 튀어나온 애들을 무시하고 일자 모양의 기억을 더듬어 대충 일자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감추기 위해 진하게 그려야 했으니, 결과는 짱구 눈썹일세.


평소 화장을 연하게 하고 다녔기에 눈썹만 진한 건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다행히 앞머리가 있던 시절이라 최대한 철저히 가려봤다. 하지만 숱 없는 앞머리 탓인지 머리카락 사이로 까꿍 고개를 내미는 진한 짱구 눈썹이 자꾸만 거슬렸다.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 지저분하고 관리가 안 된 모습에 짜증이 난다. 자존감이 훅 떨어진다. 진작 눈썹 좀 정리할 걸.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다시 재택근무 스케줄로 돌아가면, 여전히 눈썹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침 시간이 아까워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는 9시 직전에 급히 세수를 하고 로션만 바른 후 노트북 앞에 앉아 일과를 시작한다. 하루 종일 내 얼굴과 눈썹을 잊고 산다. 아! 역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


다시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막무가내 눈썹을 발견한다. 관리를 안 하기 시작한 단계에서는 진하게 그리면 감쪽같기나 했지, 이제는 전진도 후진도 막힌 일명 거지 존에 접어든 것. 인간의 눈썹은 애초에 어느 정도 틀을 갖추고 태어나는데, 동안을 쫓다가 수지발부신체부모의 법도를 어긴 나는 아메바와 같이 형태도 없는 눈썹을 갖게 되었다. 거지 존의 눈썹은 좌우 빈부격차도 심해서 오른쪽은 눈썹산이 얼추 이전 형태를 갖춘 반면, 왼쪽은 성장이 더뎠다. 확실한 건 다시 일자 눈썹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출근 준비로 바빠 정리할 시간은 없으니 빈 곳을 메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눈썹산이 기준이 되어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반강제로 아치형 눈썹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자 왼쪽 눈썹산 위의 빈 곳도 채워졌고, 그러는 사이 오른쪽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양쪽 눈썹은 균형을 잡으며 제법 가지런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굳이 좀 더 깔끔해 보이고 싶다면 눈썹 아래쪽 지저분한 부분들만 손질해도 되었다. 위아래를 다 정리하며 일자형 눈썹 형태를 유지하던 시절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눈썹들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었고,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자연스러운 내 눈썹 모양으로 돌아왔다.




사실 "다시 찾은 내 눈썹"에 대한 글은 몇 주전에 써두었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아 일단 놔두었다. 내 글은 수미상관은커녕, 매번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마무리되거나 마무리 단계에서는 뱀조차 찾지 못한 채 열린결말로 끝이난다. 아니 처음부터 용이 아닌 뱀이었을 수도 있다. 그 뱀이라도 다시 찾아와서 사두사미(蛇頭蛇尾)라도 만들고 싶은데 써 내려가야 할 문장들이 머릿속을 뱀뱀 돌뿐 쉽게 꺼내지지 않는다.

수미상관 : 머리와 꼬리, 처음과 끝이 서로 이어 통함
용두사미 : 용의 머리와 뱀의 꼬리라는 뜻으로, 처음은 좋지만 끝이 좋지 않음을 이르는 말


오늘 아침 마무리를 위해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입을 동그랗게 말아 후~ 하고 숨을 불어 본다. 마치 비눗방울 막대에 대고 불어내는 입김과 같아서 몽글하게 글자 방울들이 하나씩 생겨나는 기분이다. 자유, 나다움, 유행, 자연스러움 등등의 글자들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오른다. 잡아보려했지만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고는 무질서하게 사라진다. 떠오른 글자들을 엮어서 질서 정연하게 마무리를 해보고 싶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던 경험을 써내려가는 작업 자체는 그 감정이 환희이건 슬픔이건 간에 늘 달콤하고 유쾌하다. 하지만  마무리를 단계로 접어들면 키보드 위를 거침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주춤거린다.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건 생각의 필터 없이 직관적으로 툭툭 써내려 지는 데 반해, 마무리 단계에서는 단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멍하니 글자 비누방울 놀이를 한다. 


괜스레 책을 뒤져보고 명언을 검색하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들여다본다. 작은 단상에도 깊이 생각의 뿌리를 박고 새싹을 틔운 뒤 나무기둥을 만들고 가지를 쳐가고, 봉오리를 맺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수려하다. 그만큼 수많은 연습을 해왔던 걸까. 아니면 타고난 걸까. 그에 비해 내 뿌리는 이리도 약한 것인가 아니면 물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 굵은 나무 기둥은커녕 잎사귀 하나 내는 데에도 버겁다.


마무리를 매끄럽게 해야 한다는 부담은 늘 글쓰기를 멈추게 했다.  


눈썹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무(無) 재능 글쓰기 애호가의 글쓰기 고충에 대한 토로로 변모하고 있구나. 버튼만 누르면 추상적인 개념을 수사하는 문장이나 단어들이 우루루루 쏟아져 나와 선택만 하면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계속 쓰기 위해, 연습과 기술이 부족한 지금의 나를 인정해보려 한다. 투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본래 내 눈썹을 인정했듯이.


전문 작가가 아니기에 단지 기록하는 자체가 즐겁고, 그 글에서 묻어나는 감정으로 다시 한번 호흡하는 과정이 따뜻하며, 그 당시 혹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계속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글을 잘 쓰는 타인의 표현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고 능력의 한계를 숨기는 데 급급한 데다, 내게 맞지 않은 것을 흉내 내려 하고 있다니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공연히 힘만 주다가 자연스러움마저 잃어갈까 봐 깔끔한 마무리 글에 소질 없는 나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멋들어진 표현법은 잘 모르지만, 소상한 기분이라도 글로 털어 내고, 유치한 경험이라도 글로 웃어내며, 서글픈 기억이라도 글로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므로.


덧.

내 눈썹 모양은 원래부터 아치형, 엄밀히는 삼각형이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굳이 유행에 맞추거나 예쁘게 다듬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무도 내 눈썹이 세모인지 동그라미인지 일자인지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남편 조차 원래 그 모양이 아니냐며 전혀 몰랐다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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