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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Sep 26. 2024

쓰러져버린 울타리

하루아침에 낯선 세상으로 던져져야 하는 기분이란


1994년 2월 15일,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지금은 창원으로 합쳐진 경상남도 마산의 어느 한 병원에서 태어나 10살이 되던 해까지 함안군에서 자랐다. 3년 전 아버지의 빚 문제를 해결하러 함안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시간이 멈춘 듯 여전한 풍경이었다.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아련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을 곱씹으며 친형과 함께 어릴 적 거닐었던 거리를 천천히 되짚어 걸었다. 지역 발전을 생각하면 좀 더 나아지길 바라야 하는 것이 맞지만, 왠지 이곳만은 그대로 남아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들끓었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기초자치단체의 단위인 '군' 밑에 '읍, 면, 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등장하지만, 좀처럼 도시에 사는 현실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단위의 동네에서 나는 나고 자랐다.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동네시골 중에서도 시골이었던 터라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부잣집이라고 부를만한 집은 동네에 없었다. 잘 살면 그런 시골 동네에서 살 리가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나마 부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형이 한 명 있었다. 최신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던 친한 형이었는데,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그 형의 아버지는 오래전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다방에서 일을 하는 신세였다고 한다. 그땐 좋은 장난감을 들고 다니는 것 하나만으로 세상의 전부를 가진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 어떤 값진 것을 가진 사람을 보아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그 사이 꽤나 많은 일들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유행하던 애니메이션 속 장난감을 매번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부족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나름 굳건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국내 기업 '오뚜기 식품'의 대리점을 운영했었다. 그 당시 동네 신축 아파트였던 집이 있었고, 대리점 한편에 달린 작은 방도 집처럼 여겨 왔다 갔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상 집이 두 채인 것이나 다름없어서 집과 집 사이를 오가며 동네가 내 세상이었던 듯이 누비고 다녔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운영하던 대리점 규모를 축소하고 남는 시간에 택시를 운행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대리점 맞은편에 있던 동네 슈퍼(슈퍼마켓)를 인수해 운영하게 되었다.


"우와, 너네 집 슈퍼해? 부럽다"


동네 아이들은 날 부러워했다. 사실 어머니는 나름의 교육 방침으로 하루에 하나의 간식만을 나에게 허락했지만,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하지 않았다. 슈퍼에 있는 과자들을 원하는 만큼 매일 먹어치우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주길 바랐으니까. 이맘때쯤부터 우리 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내가 성인이 되어 뒤늦게 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친형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에게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 있냐며 난색을 표했다. 대리점이 적자를 면치 못하자 아버지는 자투리 시간에 택시기사를 하여 빚을 탕감하려 했던 것이었고, 마침 맞은편 슈퍼를 하던 집이 다른 곳으로 급하게 이사를 가야 하는 바람에 우리가 가게를 인수하여 운영했던 것이었다. 가계 살림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셨다고. 일고여덟 살의 내가 알기에는 벅찬 정보였다. 그 나이 또래에는 그저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이니 말이다.


어머니는 그 시절의 나를 '밝고 명랑한 아이'로 기억하고 계신다. 나 역시도 큰 고심이나 걱정 없이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나이대에 고심이랄 게 있으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성격도 워낙 사람들과 격 없이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서 친구들과는 늘 웃으며 잘 지냈었다. 뛰놀기 좋아하고, 선생님과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공부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 체육대회를 앞두고 '줄넘기 시범단'을 했던 기억일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댄스 줄넘기(?) 중에서도 초보적인 수준의 동작을 익혀 전교생을 대상으로 시범을 보였던 경험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전교생 중에 나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대략적인 사건은 이러하다. 체육 시간에 친구들과 해맑게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나를 눈여겨보던 담임 선생님이 방과 후에 친구 두 명과 나를 남으라고 한 뒤에 비디오 영상 하나를 틀어주었다. 애니메이션 '호호 아줌마'의 주제곡에 맞춰 줄넘기를 현란하게 넘는 시범단의 영상이었다(생각나서 '호호 아줌마 줄넘기'로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더니 그 영상이 나온다!). 이제 와서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영상이지만, 어린 마음에는 대단히 멋지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번 체육대회에서 전교생이 이 줄넘기 퍼포먼스를 할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그 시범단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당시 선생님의 말씀을 거스를 만한 명분을 떠올리지 못했고, 우리는 방과 후에 뛰노는 시간을 반납하고 줄넘기 연습에 몰두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살면서 처음으로 열심히 했고, 처음으로 남들보다 뛰어나게 해냈던 게 이 '줄넘기'였을 것이다. 숱한 연습 끝에 가장 어려운 난이도인 동작을 내가 셋 중에 가장 먼저 성공해 낼 수 있었다. 발을 양 옆으로 자명종 시계추처럼 흔들며 줄넘기를 하는 동작이었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실제로 해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뒤이어 친구들이 차례차례로 성공해 냈고 우리는 '시범단'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내 자랑을 조금 더 덧붙이자면, 둘은 동작을 성공시키기는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였고, 나는 비디오 영상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매끄럽게 줄넘기를 해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은 나에게 줄넘기 시범단의 센터를 맡겼다. 첫 연습을 위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날, 우리 시범단은 당당히 사열대 위에 올라 흘러나오는 호호 아줌마의 주제곡에 맞춰 동작들을 깔끔하게 선보였다. 음악이 종료됨과 동시에 시범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저걸 어떻게 해? 우리도 저걸 하는 거야? 하는 웅성거림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뿌듯했다. 눈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작을 수행해내지 못하고 줄넘기 줄을 온몸에 감은 채 좌절하는 모습들은 나의 지난 노력들을 더욱 빛나게 함과 동시에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막상 체육대회 당일에는 임시로 비치된 좁은 사열대에 올라 줄넘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엉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 줄넘기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나에게 꽤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 무언가 열심히 하면 성취해 낼 수 있다는 사실과 무언가를 남들보다 잘 해냈을 때의 뿌듯함이 어떤 느낌인지 은연중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이런 식의 회상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머리로 제대로 헤아리기 이전에 경험으로써 남겨놓는다면 훗날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나 역시 이런 경험들 덕분에 좋아하거나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라면 일단 부딪혀보고, 거기에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이는 노력도 주저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훗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어느 음악 시간에, 좀처럼 소리가 나지 않던 단소를 집어던지고 딴짓을 하는 아이들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단소를 붙잡고 씨름을 하여 가장 먼저 아리랑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경험 역시, 줄넘기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작은 성취들 하나하나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소중한 추억이 깃든 나의 행복했던 초등학교 4학년은 무사히 마무리되지 못했다. 단잠에 빠져있던 어느 새벽, 어머니가 다급히 나를 흔들어 깨웠다. 지금 바로 함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했다. 어쩐지. 전날에 이것저것 보따리에 짐을 싸놓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들이 스쳐갔다.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속으로는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 밑으로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형과 나는 부모님이 지시한 대로 조용히, 얌전히 우리 가족의 짐들이 가득 실린 이스타나(대형 승합차, 지금은 단종되고 없다)에 몸을 실었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어머니는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물어본다 해도 내가 원하는 대답은 들려올 것 같지 않았다.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는 형의 뒷모습은 왠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내일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동네의 모습들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 왠지 슬프진 않았다. 스스로 태생부터 꽤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그때부터 나는 좀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다짐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친구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꽤나 담담했던 나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미처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기도 전에 떠나버린 것이기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새벽,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는 예기치 못하게 쓰러져버렸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험난한 세상에 또래 아이들보다 더 일찍 던져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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