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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by 금숙이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허진 옮김. 다산책방


올 한 해 완전히 꽂혀서 읽고 있는 클레이 키건 작가의 신간.


무덤덤하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주인공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쭉 들리다가 무심한 듯 툭 내뱉는 한 마디의 말 혹은 발길질 한 번에 작가가 하고 싶은 모든 분노, 실망, 슬픔, 희망, 위로가 들어있다.


[너무 늦은 시간]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연애하다 청혼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이 남자의 회상으로 쭉 나온다. 그 남자의 회상 안에는 그가 결혼하려고 했던 여인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무엇을 주려고 했는지, 혹은 줄 수 있었는지가 나와 있다. 그는 여자가 요리하고 집안일을 해주고 침대를 데워주는 것만을 생각하고,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생각하거나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현명했다. 그의 이런 마음을 깨닫고는 미련 없이 결혼을 취소한다. 남자는 결혼했을 날에 혼자 남아 분노하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과거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실수를 하고 고치지는 않는다. 여성에게 어떤 권리나 배려도 하지 않는 채로 살아갈 남자는 지독하게 외로운 삶을 감수해야 한다.

주인공 남자가 젊은 시절, 동생이 육십 살인 엄마를 장난으로 넘어지게 만들고 함께 웃었던 장면을 회상할 때, 진심 놀랐다. "감히 엄마를!" 우리나라의 효 사상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나이 드신 엄마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장면에 욱했다. 그렇게 컸으니 제대로 반려를 구할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부부들이 결혼하고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보'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여보'라는 단어의 뜻은 '보배와 같다'이다. 배우자는 인생 여정에서 발견한 보배인 것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낯설고 무례하고 비이성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복수를 보여준다.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주인공은 유명한 작가가 살았던 집에서 일정 기간 머물며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새벽같이 운전해 도착한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며 영감을 얻고 새로이 충전해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낯선 남자가 이 숙소를 둘러보고 싶다고 요청하는 전화가 온다. 주인공은 방해를 받는 것이 싫었으나 직접 케이크를 구워 대접한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런 훌륭한 곳에 묵으면서 수영이나 하고 케이크나 굽는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비난하며 욕을 한다. 주인공은 그 남자를 내쫓고 잠이 들었으나 새벽에 깨고 만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그녀가 쓰는 소설에서 그는 병에 걸렸고 죽음이 눈앞이고 엄청 고통을 당한다. 그 남자는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소설가는 소설에서 미운 사람을 등장시켜 그들의 운명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최고의 복수 방법인 것 같다. 앞으로 해볼지도 모르겠다.


[남극]은 첫 문장이 아주 셌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외도하면 어떨지 궁금하다니? 진정 행복한 생활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외도하는 남자가 위험한 인물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나올 때마다 무서웠다. 하지만 막상 마지막에 감금당하는 주인공을 보니 올게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쾌락에는 항상 나쁜 결말이 따라오니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제일 재미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부당한 일들 때문에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 작가의 글을 통해 선명하게 각인될 때, 아프고 불편하지만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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