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
미술 비평가란 어떤 직업일까? 분야를 막론하고 평론이라는 계통은 굉장히 깐깐할 것 같고, 웬만해서는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인상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지연 비평가의 글에서는 섬세한 따뜻함과 예술에 대한 애정이 수채물감처럼 번져 나온다. 그에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작가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타인이라는 개별의 세계는 아주 낯설기에 도무지 완전하게 겹칠 수는 없지만, 어떤 이가 남긴 작업이라는 그림자를 섬세하게 주워 모은다. 모아서, 평론가의 도구인 언어로 재해석한 후 그것을 다시 미술품을 보러 오는 관람객들에게 소개한다. 작가의 세계, 평론가의 세계, 관람객의 세계가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 미술관인 것이다.
타인의 세계는 아무리 그림자를 이어 붙여도 닿을 수 없는 원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먼 풍경을 향해 나란히 걷는다. 끝내 닿을 수 없을지라도 서로의 세계에 닿기 위해 손을 뻗은 채, 따뜻한 눈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p.14)
전시회를 좋아해 이번 주말에도 다녀왔다. 미술 사조에 대한 학술적 지식은 많지 않아 그저 느낌대로 마음이 가는 작품을 좇을 뿐이지만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나의 세계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가는 것 같다. 금의 틈을 비집고 새로운 무언가가 자리 잡는다. 그것을 감동이라고 부를까. 그렇다면 미술관에서 나온 나는 들어가기 전의 나로부터 아주 조금 달라진 세계를 가지고 나온 것일지 모른다. <등을 쓰다듬는 사람>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일요일 낮에 한가로이 미술관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각 소챕터에는 미술품 혹은 작가가 하나둘씩 소개되어 있고, 그곳에서부터 시작한 김지연의 삶의 단상들이 다소곳이 놓였다.
1부, 이미 있는 아름다움을 쓰는 일
그림이든 사진이든 간에, 미술 작품은 어떠한 장면을 묘사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액자 속 장면은 정지해 있지만 실제 삶의 장면들은 유기적이다. 시간은 흐르고, 여러 가지 감정과 감각들이 교차한다. 시간, 감정, 감각…. 그러한 추상적이고 형상이 없는 것들이 물리 세계에 존재하는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이를테면 빈 테이블을 찍은 사진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웅성웅성 있다가 떠나가고, 사물만이 남겨진 테이블. 우리는 빈 술잔과 반만 남은 케이크, 뒤로 빠져 있는 의자에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비어 있는 부분은 상상력이 채운다. 그래서 때로는 가득 찬 그림보다 여백이 많은 그림이 더 풍성하고,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가 영상보다 더 생생하다.
사진을 더 찍어둘걸,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분위기는 거기 테이블 위에 남아 있고, 이미지는 한 장이면 족하다. 마치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볼 한 점의 그림처럼. (p.21)
2부. 우리가 그리는 커다란 원
비평가가 생각하는 좋은 작가의 덕목이란 무엇일까. 짜릿한 재능과 번득이는 천재성도 위대한 작가를 만들겠지만, 김지연 비평가가 집어내는 특성은 의외로 성실성이다. 그는 작품 외에도 제작 연도를 주의 깊게 살핀다고 한다. 최근 연도의 숫자들이 빼곡하다면 그것은 작가가 한동안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렸다는 뜻일 터. 밤샘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집중력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 간의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순간적인 폭발력보다도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잔근육이다. 이따금 마음먹은 일을 지키지 못하고 피로해질지라도 아예 멈춰 서지는 않는, 뜨거움보다는 미지근한 열정이 진정한 롱런의 비결이다.
태워버릴 것처럼 내리쬐는 여름의 햇살은 내 삶도 말라붙게 만든다. 그보다는 따스한 봄빛 아래에서 촉촉하고 통통한 마음을 오래오래 돌보고 싶다. (p.59)
3부. 바다를 건너는 용기
작업은 종종 외로운 일이다.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사진을 찍는 일…. 모두 그렇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작업도 움직이지 않는다. 노는 누가 대신 저어줄 수 없고, 갈 길은 아득해 보인다. 나아가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망망대해를 건너는 데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건너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결과물이 흥행한다는 보장은 없다. 불안한 길을 한달음으로 줄이는 방법 같은 건 없지만, 건너는 시간이 덜 고통스러운 방법은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손쓸 수 없는 것은 흘러가도록 두되 나머지 부분들을 기꺼이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노는 내가 저어야 하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고 있는 수많은 항해 동지의 불빛을 보며 간다면 못 건널 것도 없는 길인 것이다.
쓸쓸하지만 충만한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것들 사이를 통과하며 여전히 삶은 견고하다는 진실을 몸으로 배운다. (p.109)
4부. 우리는 함께 자란다
상대를 기껍게 여길지라도, 언제나 누군가의 곁에 있어 줄 수는 없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김지연은 한 작가의 그림을 보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가 걸어온 길이 어렴풋이 만져지는 것 같다고 한다. 숨을 고르고, 무릎이 꺾이고, 헤매며 걷다가 어딘가에 도착했구나. 도착지의 풍경은 캔버스 안에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그곳에 쉼표를 찍고 또 어딘가로 떠난다. 쉼표의 이미지를 뒤이어 온 관객들이 통과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만들어 낸 작가, 경험한 관객, 작품이 남겨진 세상 모두 이전과는 다르다.
전시를 본 뒤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는 실패와 죽음과 기다림에 관한 많은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그림을 먼저 보았기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의 주석처럼 느껴졌다. (p.146)
<등을 쓰다듬는 사람>은 김지연 비평가가 작가들의 등을 섬세하게 쓰다듬어 내려가는 과정이다. 등은 자신의 몸에 있지만 스스로에게 낯선 곳이다. 등을 보이면 약점이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는 보이지 않지만 남에게는 열려 있어 불안하고 약하다. 혼자서 손을 뻗어서 만져 볼일도 없는 곳이기에 남의 손길로써만 인지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비평가는 작가 자신도 등지고 있던 작품의 맥락을 살살 풀어내어 관객과 함께 나눈다.
미술관에서 한 작품을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숨을 느리게 쉬게 된다. 작품이 가진 힘이 나를 잡아두어 삶을 잠시 느려지게 한 것이다. 느슨해진 틈새로 작품의 이야기가 파고든다. 낯선 언어 같지만, 아주 조금씩 들리는 낱말도 있다. 비평가가 등을 쓰다듬는 과정은 번역이기도 해서 혼자 볼 때보다 더 맡은 문장이 내게 온다.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자유이지만, 때로 비평가의 작업 그 자체도 하나의 예술로 느껴진다. 빠른 삶에서 잠깐의 멈춤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김지연과 함께 느리고 따뜻한 미술관을 걸어보자.
*해당 콘텐츠는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