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혼자 살까
- 어리섞은 질문들
그림책 < 어리섞은 질문들 > 은 어린이책 작가 필립 코렝탕(1936-2022)이 2017년에 콜데로와지르 출판사에서 출판한 프랑스 그림책이다.
어린이책의 글 작가이면서 그림책 작가인 필립 코렝탕을 연구한 프랑스 국립 직업학교의 학생인 샤를 포텡은 출판사 협회의 한 인터넷 사이트인 리코세(RICOCHET)에서 작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어린이를 재미있게 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밤마다 아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들을 귀찮게 할 뿐이다. 반대로 아이들을 웃게 할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을 깨워야 한다. 어린이는 간지럼 타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부터 재미있는 책으로 아이들을 간지럼 태우자. ”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비단 저녁시간에 잠들기 전이 아닌 언제든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 나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히 필립 코렝탕이 언급했듯이 사회의 관습에서 '나 자신이 깨어나기 위한'에 방점을 두는 책 읽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필립 코렝탕은 어린이들만을 위한 작가는 아니다. 어른을 향해서도 동시에 말을 걸고 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의 관심을 끌고 있다. 더욱이 그림책 <어리섞은 질문들>에서 부모인 어른들이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앞서 이야기하자면 그 질문들이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질문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그림책을 통해 부모 혹은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림책 <어리섞은 질문들>은 일상에서 부모에 의해 툭 던져지는 ‘어리석은’ 질문들을 견뎌내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질문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반대로 이번 필립 코렝탕의 그림책 <어리섞은 질문들>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아이들의 질문과 어떻게 다를까. 어떤 질문이 우리 삶에서 ‘어리섞’을 수 있는지 필립 코렝탕이 그리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그야말로 생각하지 않고 던지는 일련의 말들에 대해서 눈을 크게 뜨기 위해서 말이다.
책장을 열면, 첫 속지의 첫 번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귀 모양이면서 동시에 물음표로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 안에 무척 놀란 표정의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심상치 않다.
우리는 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한다. 물론 ‘수화’를 통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비단 귀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보는 것이고 특히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림책 속지의 첫 이미지는 귀로 질문을 듣는다는 것이 무척 충격적인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이가 화장실 앞에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자신의 중요한 부위를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무척 급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엔 이미 흥건히 소변이 흘러있다. 딱 봐도 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화장실 안에서 묻는다. “급해?” 급하지 않으면 왜 화장실 문을 두드릴까? /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다. 얼굴과 손엔 붉은 반점투성이다. 길게 내민 혀가 뜨거워 보인다. 열이 심하게 난다. 아빠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학교에 안 가?” / 아이가 샤워를 하는데 엄마가 옆에서 계속 뜨거운 물을 튼다. 아이는 온몸으로 물이 뜨겁다는 것을 드러낸다. 엄마는 아이에게 묻는다 “뜨거워?” 아이는 이미 뜨거운 물에 익을 대로 익었다. / 아이가 양치를 하고 있는 중인데, 엄마는 아이에게 묻는다 “양치 다 했어?” 그밖에 무수히 많다....
아이는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부모는 아이의 표정, 표현에 아랑 곳 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관심 없다.
비단 아이에게만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다. 길에서 갱스터들이 자동차들 사이에서 한창 총질을 해 대고 있다. 엄마는 자신의 자동차를 갱스터들 차동차에 가까이 대며 묻는다 “차 뺄 거예요?”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저 자신의 목적에만 다다르면 되는 것 같다.
책, 영화 그리고 삶
최근 파리에서 한국 영화 < 다음 소희 >를 상영하고 있다. 안타깝게 영화 제목은 < About Kim sohee> 둔갑했다. 한국 젊은이들이 노동현장에서 죽어나가는 한국사회의 일련의 사회적 비극을 폭로하고자 하는 애초의 영화의 메시지를 축소시켰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지만, 프랑스의 많은 매체들이 앞다퉈 한국영화 < About Kim sohee >를 소개하고 있다. 한 매체는 주인공 김소희가 일한 인턴쉽 과정을 ‘stage fatal’ 즉 치명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인턴쉽 과정에 빗대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어디 인턴쉽 과정만 치명적인가, 일상의 인간관계 역시 치명적이다. 프랑스의 인터넷 매체인 시네세리 (cineserie) - 영화, 드라마 등에 대한 비평글을 쓰는 매체 - 에서 영화 <About Kim sohee>에 대한 관객들의 후기가 이어졌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순위와 달성해야 할 목표뿐인 성과위주에 기반한 사회를 젊은 층의 희생을 통해 다루고 있으며, 한국 젊은 층의 자살을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는 경쟁시스템과 실패로 점철된 기성세대를 폭로하는 고발자로서 이 영화를 다루고 있다'로 일갈한다.
한국에서 영화 상영 이후, 국회에서는 일하는 학생들의 보호강화를 위한 법안이 채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그러나 정작 사회 전반에 그리고 우리 일상에서 흐르고 있는 소통 단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점점 듣는 일이 힘들어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손과 눈에서 떼지 않는데, 정작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다. 듣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말이다. 아무도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영화 <About Kim sohee> 프랑스 상영 후 정주리 감독은 끊이지 않는 관객들의 질문을 받았다. 한 관객은 감독에게, '영화에서 경찰 (오유진 역 - 배두나)이 당신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감독은 '나라면 이 경찰처럼 못한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라고 답했다. 감독은 영화를 이 사건이 일어난 즈음에 전혀 알지 못했고, 4년이 지난 후에야 이 사건을 알게 되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이 사건에 대한 자료수집을 기존의 기사나 문서에만 의존했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죽은 젊은이의 부모나 그의 측근들 즉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관객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프랑스들에겐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기존의 정보에만 의존한 영화와 영화감독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혼자 살까? ‘소희’가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고 하기 힘들다. 영화 내내 소희가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희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 친구들, 가족조차도 듣지 않고 자기들 이야기만 한다. 소희는 자신의 온몸으로 이야기해 왔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학생들의 인턴쉽 과정인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불공정한 착취를 당하는지, 성과만을 강요당하며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하는지, 함께 살아야 할 사회에서 얼마나 개인이 점점 고립되고 있는지.... 그러나 아무도 관심 없다. 소희의 죽음 이후도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책임을 피하기만 바쁘다.
그림책 < 어리섞은 질문들 > 아이의 엄마가 치열하게 총질을 해대는 갱스터들에게 '차 뺄 거예요?'라고 묻는 장면은 영화 <다음소희>에서 소희의 매니저가 자살한 직후 후임 매니저가 도착해 '자, 어서 잊고 일합시다'라고 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사람의 죽음 앞에 뉘우침도 애도도 없이 기계처럼 행동해야 하는 자유주의 시스템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인간인가, 함께 살고 있기나 한 건가....
자유주의 시스템에서는 오로지 관계가 있는 척만 하는 제스처만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하라고, 모든 것을 보여주라고 한다. 때문에 인터넷 관계망에 사람들이 몰리고 스마트폰은 하루가 다르게 그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미 개인적인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어떠한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정작 소통 없이 혼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책에서 아이의 부모는 연일 아이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그러나 아이는 대답을 전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 부모의 질문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관계가 있는 척만 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부모의 이런 '어리섞은 질문'은 점점 아이에게 듣는 것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호관계를 방해한다.
'듣는다'는 것은 어리섞은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 진정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 부모가 던진 모든 질문은 사실상 ’ 거짓‘된 질문이다.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온몸으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그림책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아이가 악몽을 꿨을 때, 아빠는 아이게게 묻는다. “너 악몽 꿨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악몽'을 두려워한다. 왜냐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악몽은 두려움, 공포, 알 수 없고 낯선 것에 대한 그 무엇으로 표현된다. 결국 '낯섦',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악몽'이 된 낯선 존재는 질문한다. “@Sꠔ��ﺕ?” 그러나 아무도 그 질문을 이해 못 한다. 이미 뻔한 질문에 익숙하기 때문에 익숙한 대로 외면할 뿐이다. 점점 듣는 게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악순환은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