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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스 Jun 26. 2023

내 인형

그림책 <내 인형> (Ma  poupée)은 아늘리즈 에르티에 (Annelise Heurtier) 모렌느 포와뉴넥 (Maurèen Poignonec) 그림으로 2021년에 출판사 딸랑 오 (Telant haut)에서 발행됐다.      

그림책 <내 인형>  

이 그림책은 인형 놀이를 하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아이는 인형의 머리를 빗기고,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다닌다. 햇볕이 강하기에 인형에게 선글라스를 끼워주고, 목마르냐고 묻는다. 인형의 우유병을 미리 준비했다, 인형의 담요가 바닥에 떨어졌을 땐 얼른 주어 다시 인형에게 돌려주고, 뽀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간식을 같이 나눠 먹고, 거리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을 인형에게 보여준다. 쓰레기 수거 차량이 엄청나게 크다고 말이다. 아이는 회전목마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노란색 사자를 골라 인형과 함께 탄다. 아이도 인형도 무척 행복하다. 인형과 함께 노는 아이에게 한 어른이 묻는다. “귀여워라, 너 엄마 놀이하니?” 아이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아니요, 아빠 놀이해요”     

아이는 인형 놀이를 한다. 인형과 모든 것을 나누고 있다. 그 세상은 행복하다.

 

그림책 <내 인형>은 인형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는 연령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그림책 전 페이지가 16쪽으로 아주 짧으며 하드커버로 되어있다. 당연히 엄마, 아빠 혹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이다. 첫 표지부터 얼굴이 까무잡잡한 한 아이가 인형을 품에 안고 머리를 빗기고 있다. 아이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저 아이가 인형과 함께 논다. 아이는 놀면서 크고,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놀이로 만들어 논다. 그러나 어떤 놀이를 하는가 하는 것은 아이의 선택이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기쁨과 즐거움을 풍요롭게 창조하는 장이고 시간이다. 놀이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그리고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의 놀이에 개입하길 좋아한다. 그림책 마지막 쪽수엔 어른으로 보이는 사각무늬의 치마를 입은 커다란 사람이 아이의 놀이에 개입한다. ‘엄마 놀이하’냐고 말이다. 세상엔 사각의 무늬나 형태도 있고 둥근 형태나 무늬도 있다. 그뿐인가, 다양한 형태의 무늬와 형태가 이루말할 수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이의 놀이를 '엄마 놀이'로 규정짓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지 ‘여자’와 ‘남자’ 또한 ‘성’에 따라 놀이가 나뉜다는 극단적인 분류로 아이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 ‘성’에 따라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림책의 텍스트는, 편협한 관점으로 섣부르게 아이의 놀이에 개입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주저하지 않고 어른의 편견을 깨트리는 아이의 자유로움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위 텍스트에 해당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른의 개입이 아이와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인형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 강아지에게도 마찬가지다. 강아지와 서로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소통하는 데는 문제없다. 강아지, 인형 그리고 아이는 같은 눈높이에 있다. 그러나 어른의 ‘엄마 놀이하’냐는 질문에 관계는 순식간에 뒤바뀐다. 강아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을 감고 있고, 아이는 인형을 안은 채 어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그 사이에 빈 공간이 눈에 띈다. 거리가 만들어졌다.   

   

고정된 관계는 없다. 일상에서 하는 질문과 대화로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가 우리 모두의 의지에 달려있다.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변한다. 발전하거나 후퇴하거나 한다.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 질문하는 것으로 관계는 늘 새롭게 만들어진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만들어졌고, 표면적으로야 그 관계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일매일 새롭게 만들어진다. 또 매일매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대화 등으로 말이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을 힘들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림책에서 어른의 질문 ‘엄마 놀이하는 거야?’ 만으로 봐서는 아무 문제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미 질문에 아이 그리고 놀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 있다. 위 어른은 아이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함으로써 아이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이미 판단이 들어간 질문으로 오히려 관계를 깨고 말았다. 

    

한국에는 ‘노 키즈 존’이 있지만 프랑스에는 없다. 아예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상상을 못 한다. 가끔 레스토랑에 가면,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대화하면서 밥을 먹는다. 대화의 주제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이야기의 주제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날씨 이야기, 음식의 맛이 어떤지 등등... 예를 들면, 예전에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카페인 아이스크림을 같이 팔고 있었다. 내 옆자리엔 젊은  청년 세 명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마침 실내에서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젊은 청년에게 서슴없이 그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자기가 먹은 것과 다른 아이스크림인데, 서로의 맛이 어땠는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로 아는 사람들인가 생각했다. 웬걸,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이도 서슴없이 아이스크림 맛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고 청년 역시 자기가 먹는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선 아이의 부모가 그들의 대화 속으로 금세 들어가고....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아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렇다. 매일매일의 날씨 이야기, 먹는 음식 이야기 등등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화에서 배제하지 않고, 아이들이 어른들과의 대화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지루해할 틈이 없다. 지루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다.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틈이 없다. 아주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혹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식사 자리에 우연히 가도 어른들은 웃음으로 아이에게 말을 건다.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게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어른들과 아이와의 관계를 매일매일 새롭게 만든다.      


또한 거리를 걷다 보면 아이를 동반한 어른들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것이 그들이 사용하는 액세서리이다. 걷기에 이른 아이 혹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을 동반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흥미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특히 아빠로 보이는 남자 어른이 아이와 다니는 모습이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지만, 남자 어른이 사용하는 액세서리에 눈길이 간다. 아빠가 아이를 아기띠를 사용해 등에 업거나 안고 또는 유모차에 태워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본다. 남자아이가 인형을 자기 유모차에 태워 다니는 경우도 자주 본다. 딱 그림책의 아이의 모습이다. 여기에 성별 구분이 왜 필요한가.     

왼쪽에서 걷고 있는 남자 어른은 자세히 보면 티셔츠를 입은 게 아니라 맨살에 '아기띠'를 이용해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다. 남자 오른쪽 팔꿈치 바로 아래에 아기발이 보인다. 

 

어른 남자가 아이를 한쪽 팔에 거뜬히 안고 다니거나 어깨에 걸쳐 목마를 태워 다니는 것을 보면 무척 정겨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가 아주 작아도 시간이 흐르면 팔이 아프거나 목과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도 불편해한다. 어른 여자는 ‘아기 띠’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안기도 업기도 하고 유모차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남자 어른은 그것을 꺼려왔을까. 

‘포대기’ '아기 띠'는 여자의 액세서리로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어떤 액세서리를 사용하는가 역시 누가 누군가를 지배하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는 중요했다. 액세서리마저 ’ 성‘에 따라 여자용, 남자용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고약하다.  

얼핏 보기에 남아아이로 보이는 아이가 유모차를 끌고 있다. 유모차 안에는 인형이 편안히 누워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좌우 자동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조심히 살피고 있다. 

2023년 6월 24일, 파리에서 GAY PRIDE 가 열렸다.  LGBTQR+ 등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표현의 장이었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권리와 자유가 있다. 어떤 경계도 어떤 판단도 어떠한 재단도 없이 내 정체성은 내가 정하고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는 메시지가 거리에 넘쳐났다. 그중에 한 슬로건은 "우리가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할 때 휴머니즘은 사라진다, 이 사회는 위험해진다."였다. 나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어떤 경계로도 구별 짓고 나누는 것은 멈추면 좋겠다.    

    

이 그림책은 2021년에 발행되었다. 지금은 2023년이다. 문학과 삶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편견이나 선입견들을 계속해서 깨면 좋겠다. 엄마 놀이, 아빠 놀이가 아닌 '아이를 잘 돌보는' 놀이와 삶,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사는 삶을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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