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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Aug 11. 2022

30년 걸려 도착한 선물

- 열을 주고도 못해 준 하나만을 기억하며 사는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글

어렸을 때, 눈치 없이 왜 그랬을까?

일찍 철이 든 건지, 늘 주인이 있던 집에서 곁방살이하던 우리 집 형편을 어렴풋이 눈치챈 건지,

엄마 따라 시장가도 십 원어치도 간식하나 사달라고 조르는 법 없는 아이였지만,

동네에 피아노 학원이 생긴 날, 이 것만은 포기하지 못했다.

내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조르고 졸라서 결국에는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아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을 초등 5학년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 음악시간 반주는 내 차지였다.

그때는 학교에도 피아노는 잘 없어서, 음악시간마다 옆반에서 옮겨온 풍금을 연주했다.


그런 음악시간 준비를 위해서 

피아노가 필요하기도 했고,

그냥 틈나는 대로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며, 뽐내기용 명곡 연주라든지, 예배시간 CCM이나 찬송가 반주 연습 등 내 취미 생활을 위해서 피아노가 있으면 참 좋겠다 싶기도 했다.

그 당시,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은 가정살림 형편이 괜찮다는 부의 표현으로,

실제로 집에 피아노를 두고 연습까지 해 오는 아이들도 종종 있어서 부러워 한적은 있지만,

오히려 피아노 학원조차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많았기에 피아노가 없음에 대한 불편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피아노를 사주지 않음에 대한 불만이나 원망과 같은 감정은 더더욱 내 맘속에 품은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남들 살림살이보다 못한 우리 집 형편에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크나큰 선물과도 같았기에 부모님께 피아노까지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색조차 한 적도 없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색조차 안 했다는 그 기억은 틀린 것 같다.

아니, 틀린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는 당시 가부장적인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자상함이 큰 아버지였기에 자녀가 말하지 않는 속내까지도 다 읽어낼 능력이 있는 아버지였으리라....

그런 능력을 갖춘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선물 받은 건,

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직후도 아니고,

피아노 반주법을 새롭게 배워보고 싶던 6년 후도 아니며,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이 많던 대학생이 되었던 10년 후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선물을 받기까지는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피아노를 선물을 받은 때는 성인이 되어 바쁜 일상 속에 더 이상 피아노는 취미도 특기도 아닌,

소리를 내는 악기로만 여겨지던 그 시점이었다.

피아노에 대한 열망도 바람도 그 어떤 욕구도 없어진 때였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늘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난 평범한 어른이 되어 취직을 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때까지는 내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는 느낌이 들만큼

구축이긴 하지만 국민 평균 평수보다도 좀 더 넓은 아파트까지 대출 없이 사는 행운이 뒤따랐다.

여담으로, 현재는 주변의 신축 아파트들 값이 너무 올라버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도 많지만....

이렇게 촘촘히 어른으로서의 내 삶이 건전하게 잘 진행되고 있었기에,

피아노가  꼭 갖고 싶은 워너비 아이템은 전혀 아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내가 살 수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물건이었다.

딸을 생각하면, 딸아이 방에 피아노가 있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버지가 선물을 해주던 그 시점에는 내 딸이 피아노에 흥미를 가질 만큼 나이 들지는 않았었다.

몇 년 후에 사도 전혀 문제 되지 않을 아이템이라 이사하고 새로 집 꾸미기에 바쁠 그 시기에 우리 집에 들이고 싶던 물품 리스트에서는 볼 수 없던 품목 중 하나였다.

그렇게 피아노는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물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삿짐이 다 들어오고,

정리가 된 며칠 후에 친정 부모님은 우리 집을 둘러보러 오셨다.

새롭게 인테리어도 하고, 가구도 들였으니 소소하게 구경할 것들이 있을만했다.

이방 저 방 재미나게 구경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는 무언가 이야기하시고 싶어 하시는 눈치셨다.


"새로 이사를 했으니, 나도 선물을 하나 하고 싶구나."


이 말을 듣자마자, 나보다 36살이나 많으시던 아버지께서 혹여나 노인 취향의 그 무엇을 우리 집에 들여놓으실까 봐 선물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나는 조심스레 거절을 했다.


"새삼, 선물은 뭐하려고요. 이사할 때, 새로 구입한 게 많아서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없어요, 아빠. 제가 잘 사드리지는 못하니, 그 돈으로 엄마, 아빠 맛있는 거나 사 드세요."


"이제 집도 넓어졌는데, OO이 크면 피아노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저 방이 커서, 저기 들어갈 공간도 있어 보이고...."


아버지는 분명 외손녀를 구실 삼아,

선물을 하시겠다고 했지만, 내 귀에는 그 이름이 내 이름처럼 들렸다.

분명, 선물을 하는 입장이라 당당하셔도, 사주는 입장이라 목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에 힘을 주며 조금 허세를 떨어도 괜찮을 터였다.

그런데, 내 귀에 들린 그 음성은 조금 나지막한 톤으로 말끝에 힘은 빠지고 자신감 없이 반은 웅얼거리는 듯,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말투였다.

분명, 뭔가를 미안해하는 말투였다.

순간, 이 힘없는 말투가 무슨 의미인지 본능이 먼저 해석해버렸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자식에게 주고, 또 주는 삶을 살고 계셨지만,

딸이 받으면 좋아할 선물 하나 제때 못해 줬다는 죄책감에 30년이 넘도록 이토록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아오신 건가?(이건 단순한 내 느낌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고인이 되시기 전 6개월 입원 기간 동안에, 매일 병원을 방문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계속 '못해 줘서 미안한 게 많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피아노는 마치, 열렬히 사랑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그러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연인과도 같았다.

그와 관련된 모든 추억은 가슴 한 구석에 남겨둔 채 내 삶을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 날,

행색 초라히 방심하고 나선 외출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반가움도 원망스러움도 사랑도 미움도 하필이면 이때일까 하는 부끄러움까지도 함께 밀려오는

그런 감정이 들게 하는 연인.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한 소금기 가득 찬 눈물을 삼키며, 뭐라도 아버지에게 말을 해야만 했다.


"아니에요. OO이가 아직 어린데, 천천히 사도 돼요. 그리고, 아빠가 선물하기에는 너무 비싼 물건인 거 같아요. 절대, 맘 쓰지 마세요."


피아노 가격을 알건대, 노인이 선물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담이 될만한 선물임은 틀림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말년에 부자가 되신 걸까? 국민연금으로 생계를 부양하는 노인일 뿐인데, 30년 묵은 미안함때문에 너무 무리하시는 것은 아닐까?


찰나였으나,

어릴 적 받지 못한 선물에 대한 아쉬움의 감정이나

지금 당장 받을 선물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 솟아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30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내게 미안해했을 그 마음이 너무나 애처롭고 안쓰러웠고,

동시에,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딸이 받고 싶어 했을 선물을 평생 마음에 담고 계실 만큼

지독히 나를 사랑하신 게 더욱 분명해져서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고 동시에 고마웠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 집에 피아노가 배달되었다.

새집 장만 기념, 손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선물이 30년 걸려서 도착한 내 선물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면 불편한 부분도 있을 터인데,

피아노와 시작한 불편한 동거는 금세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으로 가고 나면, 피아노는 오롯이 내 차지가 되었다.  

빈 집을 피아노 선율로 가득 채우고 있노라면,

30년 늦게 받은 선물임에도 내 나이는 30년 전 그대로, 한 살도 먹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어린이 집을 다녀와도 피아노 치는 엄마가 신기한 것인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를 연주해줘서 그런 것인지,

손쉽게 피아노를 나에게 양보하고서, 이 노래 저 노래 연주해달라고 주문을 했다.


이제는 피아노를 딸에게 양보해야 할 만큼 아이들이 자랐지만,

우리 집 거실 한켠에 우두커니 자리한 피아노는 여느 평범한 노래를 들려주는 악기가 아니다.

5년 전 고인이 되셨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거시는 아버지와도 같다.

간간히 아버지가 그리운 날에 선물 받은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일은,

함께한 시간들, 함께한 추억들, 함께 나눈 대화들이,

노래가 되고, 멜로디가 되어,

내가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첫 기억의 시간부터 아버지 마지막 모습의 시간까지

아버지와 나누는 수많은 대화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생각나는 날,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저는,


피아노를 칩니다.


     


P.S> 2017, 8월의 어느 날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기념하며...





자식에게 열을 주고도 못 해준 하나 때문에 평생을 미안함을 갖고 사시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당신께서 못 해줬다고 미안해하시는 그 한 가지는 무엇이었는지 당최 기억나지 않고,

부모가 되고 보니,

당신이 해주신 것이 열 가지뿐인 게 아니라 그 이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식에게 못해줬다고 생각되는 그 한 가지로 자녀들은 기억하지도 못할 미안함의 족쇄에 얽매이지 마시고,

자유로워지셔서 이 세상 평안한 맘으로 부디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이 생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만나,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인 그런 분이십니다.

자녀들이 그 은혜 갚을 기간 충분하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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