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이다. 그리 춥지 않은 온도지만 세상은 비밀을 속삭이다가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고요하다. 새들의 지저귐도, 마을 사람들의 오가는 소리도, 마을 이장의 확성기 소식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적막하다. 연붉은 노을 안에 낮달만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런 겨울의 하늘은 숙연함을 닮은 특별함이 있다. 노을빛 겨울 하늘만이 닿을 수 있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데, 어떤 안타까움으로 삶을 돌아보는 시선과 어떤 예감으로 가득찬 새로운 삶이 열리는 시선이 하늘을 교차한다. 그래서 십이월의 하늘빛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침잠하게 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생의 소멸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미한 빛을 따라 모든 식물들이 사그라들고, 묵은 흙만이 휑뎅그렁한 정원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복숭아 나무를 바라보다가 벌레들이 가득 베어 문 복숭아가 속상해 과일 나무용 살충제를 뿌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 누렇게 말라버린 매실을 보며, 제 때 수확하지 못했음에 대한 한탄. 앵두나무 가지가 옆으로 퍼지지 않게 가지치기를 좀 더 촘촘히 해주었어야 했다는 아쉬움. 이런 류의 후회들이 앞다투어 다녀가지만, 나무들의 어여쁜 꽃을 캄캄한 입을 벌리고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과 갈색 바구니에 갓수확한 과일을 한아름 담아서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흐뭇하게 씻었던 추억들도 되돌아오곤 한다. 반성과 자책, 그 어디즈음에서 사십 대의 겨울은 시작되지만, 사실 자책은 다가올 봄을 위해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전적으로 자책은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을 스스로 꾸짖고 책망한다는 뜻이지만, 반성은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본다는 뜻이다. 반성은 그런 의미에서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행동을 수반한다. 나이가 들수록 경직된 생각과 달라질 것 없는 일상 탓인지, 고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반성보다는, 스스로를 책망하고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자책을 올려둔 접시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것만 같다. 사실 자책하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기도 하니까. 반성했다는 기분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으니까. 반성하는 마음으로 뒤늦게 전정 가위를 다시 고쳐 잡는다.
자책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조금도 녹이지 못한다. 자책은 나아질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스스로를 부식시킬 뿐.
정원가는 십이월이 되어도 분주하기만 하다. 부족한 영양분을 넣어주기 위해 복합비료를 준비하고, 지난 여름 병해충이 눈에 띄게 늘어난 듯해서 석회도 섞어 뿌려야 한다. 지난 가을 가지런하게 일렬로 심어둔 구근들이 행여나 속절없이 추위에 얼어버릴까봐, 텃밭과 뜨락을 빠짐없이 비닐로 덮어둔다. 입고 있는 옷이며 양말이라도 벗어서 동여매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의 친구들. 삽과 곡괭이, 쇠스랑, 호미, 낫, 씨앗 파종기... 물에 씻어 창고에 잘 걸어두어야 내년 봄에도 나의 곁을 지켜줄 것이다. 정원일을 마치고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정원 중간에 멀뚱히 홀로 있는 야외 수도가 시야에 머문다. 지난 해에 그냥 두었다가 동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야외 수도의 목덜미로 냉기가 스며들지 않게, 보온재로 마저 여며준다.
'이제 다 된 건가.'
그러고나서 하늘을 보며,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렇게나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말없이 지켜봐주는 나무들이 그곳에 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간 비스킷처럼 굳어버린 잎사귀만이 남은 나무들과 함께, 나는 적막 속에 고요히 서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남아있는 건, 너희들 뿐이구나.'
나무들과 나란히 서 있을 때면, 내가 좋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건 어떤 부류의 군집 안에 있으면 마치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과도 비슷한 감정인 듯하다. 겨울의 나무는 고독한 순례자나 숭고한 구도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런 나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면, 어떤 날은 설교와도 같고, 또 어떤 날은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굳건한 나무들을 나는 숭배하고 찬양한다. 거친 피복 안에서 가혹하게 불어오는 북서풍을 그들은 묵묵히 견뎌낸다. 매끈한 혀를 놀리며 현실을 회피하는 나와도 다르고, 진실을 가리며 변명의 가면 뒤에 숨어 사는 나와도 다르다. 나무들은 반고흐나, 니체처럼 위대하고도 고독하게 삶을 정면으로 마주한 위인들과 닮은 것만 같다. 나무들은 더 나은 봄을 위해 우듬지 끝까지 물을 길어올리느라 여전히 빠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내면을 성찰하고, 이듬해 다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꽃이 되거나, 열매가 되기도 하고, 무성한 잎이 되어 삶을 이어간다. 그건 마치 어떤 사명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마도 나무에게는 그저 자신의 숭고한 법칙을 따르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고요할 뿐이고 소란스럽지 않다. 소란스러운 나는 그들의 발 끝을 훔쳐 보며 반성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이건 스스로를 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책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무는 자책하지 않는다. 다가올 봄을 위해 말없이 행동할 뿐이다.
가끔 도망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하지만, 나에게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며, 나의 머리채를 문장들은 움켜쥐곤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쁜 생각도 하고, 욕망의 그늘에서 살아가기도 하며, 같은 실수가 반복되기도 한다. 단지 표현을 자제하고, 조금의 망설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가 한심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고, 왜 불행은 나만 피해가지 않는 걸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젊을 때도 이런 생각들을 곧잘 하곤 했지만, 시간의 느슨함과 에너지의 충만함이 다시 일상으로 나를 쉽게 인도하곤 했다. 하지만 사십 대인 지금은 간혹 찾아오는 불행을 닮은 사건들과 쓸데없는 자책의 씨앗을 뿌리는 실수들이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무겁기만 하다. 자책은 반성과 다르게 사람을 위축시켜서 끔찍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바위를 몇 배나 크게 보이게 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도록 사람의 귓속에 미친 것처럼 주문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위축된 자아와 두려움의 허상은 실수와 자책을 제곱승수로 확장시킨다. 그건 잘못하지 않은 일조차 잘못했다는 착각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기 때문인데, 삶에 있어서 자책은 그래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써 살아가야 하는 의미조차 함께 붕괴시키는 패배의식이 영혼을 놀라게 한다. 마흔을 넘어서고 점점 나약해지는 신체와 희미해지는 영혼에 자책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고통을 동반한 불행만을 지속시킬 뿐이다. 자책은 해충과도 같은 불행을 들러붙게 하는 접착제와도 같다는 생각.
아무래도 불행은 스스로 놓아주어야 한다.
나무들은 스스로를 폄하하거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삶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한 자리에서 성장한다. 때로는 땅을 내려다보며 고통스러워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정원가들은 잘알고 있다. 저 언덕에 서서 거센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겪으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조금은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나무 안에 가장 아름다운 나이테가 촘촘하게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나이테는 사실 나무의 목적은 아니다. 나무는 어떤 목표를 정해두고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무성한 숲을 이루기 위해 저렇게나 애쓰는 것이 아니다. 꽃과 열매 따위는 사실 정원가의 세속적인 바람일 뿐이다. 목표로 한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흔히들 자책하곤 한다. 마치 목표를 이루어야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행복할 것이라 여기는 착각때문에, 그 순간 자책은 쉽게 고개를 쳐들고 미소짓곤 한다. 사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근본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근원적인 비참함이 있으며, 그래서 불행이 나만 비껴가지 않는다는 오해 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나무들의 언어는 한결같다. 나무들은 나의 세속적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지만, 언제나 보편타당한 진실을 알려준다. 나이가 들수록 놓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속삭인다. 심지어는 친구와 가족조차도 각자의 삶 속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라고 고조곤히 입을 연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기 때문인데, 죽음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 운명 앞에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보다는, 수많은 반성을 통해 나무의 껍질처럼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것이 예측불가능한 삶을 의연하게 맞닥뜨릴 수 있다는 생각. 벚나무의 제일 높은 우듬지에 매달린 가장 작은 잎사귀가 바람을 따라 속살거린다. 나무에게 이건 찰나의 일이 아닌, 영원인 것이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길 때, 고통은 줄어든다.
며칠 전, 세찬 바람에 감나무 가지 두어 개가 부러졌다. 북쪽 지역에 첫 눈이 소복히 내렸다는 소식에 정원가의 마음은 한 조각 불꽃이 튄 것처럼 다급해진다. 지난 해 겨울을 떠올리며, 준비해 두어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한다. 겨울은 땅을 경작할 수도 없고, 식물을 가꿀 수도 없으며, 나무를 생육시킬 수도 없는 무력함에 빠지기 쉬운데, 그건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는 엄청난 자만때문이다. 날씨라는 건, 지구가 하는 일이라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겠지만, 특히 겨울의 날씨는 더욱 가늠할 수가 없다. 너무 가물거나, 너무 넘친다는 말들만이 자욱하다. 날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겨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놀라기도 하는데, 하물며 정원가들의 마음이란. 겨울의 정원가는 온도와 습도를 살피며, 이 계절에 스스로가 적응해야만 한다. 며칠 째, 영하로 떨어지는 한파에 땅이 속까지 바싹 말라버릴까봐 전전긍긍해야 하고,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 얼음같은 땅 속에서 골수까지 얼어버릴 나뭇가지를 걱정해야 한다. 때로는 지속되는 영상의 온도에 봄꽃 씨앗들이 철없이 싹을 틔울까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내 마음 같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계절이 겨울인 것이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자책하고 애를 쓰게 되는 계절이 겨울이라는 생각. 하지만 그럴때면 나무들은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삶이 비록 쉬운 것도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니라며, 중요한 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나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온전히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내고, 견딜 것이며, 나의 실수나 불행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둘 것이다. 오랜 나무에게서 배운 것이다. 비록 겨울의 한기와 날선 바람이 다시 나의 창을 기웃거리겠지만, 다가올 어느 봄날을 생각하며, 그 언덕의 나무를 만나러 갈 것이다. 겨울은 지루하고, 봄은 더딘 듯하지만, 삶은 그렇게 끝내 흘러가고, 그 안에는 나의 삶이 있다.
나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지만, 스스로를 자책하고 폄하하기에는 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타고 남은 뼛가루가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덧. 대설이지만, 온화한 겨울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내 마음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간혹 다녀가는 따듯함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길 바라봅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