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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강현욱 산문집.

by 시골서재 강현욱


여름. 어떠한 말이나, 글로도 묘사할 수 없는 이름. 하지만 기어코 사라질 계절.

짙은 녹빛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생명들의 목울음은 한 생을 다 받친다. 파란 하늘에 빠진 몽실한 구름은 노래하며 유유히 떠다닌다. 나에게도 이런 계절이 있었던가. 독주에 취한 호기로움은 아름다웠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연애는 순수했으며, 모든 걸 잃어버린 실패조차도 멋스러운 이야기가 되던 젊은 날의 한 시절. 한때, 나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이젠, 가을의 초입에서 갈 곳 없는 아이처럼 서성인다. 엉망으로 술에 취하면, 그다음 날 자기 경멸에 빠져 절망하고, 연애는 그늘과 얼룩이 묻은 자책으로 기대조차 하지 못한다. 실패가 두려워 조금의 용기조차도 내어보지 못하면서, 쓸데 없이 목뼈만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치졸한 자기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여름의 무심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봄은 연둣빛으로, 여름은 녹빛으로, 가을은 감빛으로, 겨울은 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세계의 무자비한 섭리가 내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자연은 모든 시간에서 아름답다. 태어나고, 타오르고, 익어가고, 내려놓아야 할 결정적 시점에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변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복적인 후회와 증오, 그리고 체념과 좌절. 계절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조금만 더 있어달라며 가당치 않은 오기를 부리다 생기는 시간과의 마찰이자, 투쟁의 결과다. 그리고 나는 번번이 패배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시시각각 늙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별 볼 일 없던 탈피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고개는 떨어진다. 변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 앞에서도 패배할 것이 자명하다. 무언가의 노예처럼, 극복하지도, 탈출하지도 못한다. 뚜렷한 주관은 낡은 고지식함으로, 주의 깊은 세밀함은 닿기조차 싫은 까칠함으로, 총명한 호기심은 피곤한 집착으로, 낡음에 따른 물리적 변화는 결국 박제된 채, 무너질 창고의 한 구석에 처박힌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항상성이 아닌, 화학적 변화를 동반한 역동성이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40대의 중반에 서서 물끄러미 뒤를 돌아본다. 나의 남아 있는 나날은, 살아온 나날만큼의 시간을 나에게 허락해 줄까.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또다시 고개는 떨어진다.

어리석게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나는 살아왔던 것이다.

며칠 전, 직장 후배와 구릿빛 맥주를 부딪치다 후배가 나에게 질문했다.

-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요?

- 아니.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의 단호한 대답에 그는 어떤 체념과 두려움이 지나가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을 더해 거들었다

- 하지만 인간에겐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는 것 같아.

- 그게... 언젠데요?

- 죽음과 맞닿아 있을 때와 자신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할 때. 사랑을 한다는 건 유일한 기적이자, 기회인 거야. 죽음 앞에 설 때는 비로소 놀란 마음으로 변하려고 애써보지만, 그 짧은 간극 때문에 결국 삶에 대한 후회로 끝나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해.

그게 이성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자신을 향한 사랑이든, 온 힘을 다할 만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간절하게 그와 동화되길 바라게 된다. 절실함은 말과 글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소소한 행동들의 변화가 일상을 바꾸고, 달라진 일상은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 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자신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사랑이다. 인간은 공포와 증오, 그리움을 동력삼아 나아가는 대는 한계가 있으니까. 비록 내 사랑의 대상은 지금 나의 곁에는 부재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한 흔적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건 막연한 그리움과는 다르다. 그가 좋아하던 책과 글을 사랑하고, 어느새 그건 나의 삶이 되었으니까.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 중. -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그동안 퇴고해 오던 다섯 편의 소설을 문학과를 졸업한 친구의 메일로 보냈다. 친구의 애정이 담긴 신랄한 비난과 비판이 기다려진다. 그런 비난과 비판들이 나의 글을 성숙하게 하고, 나를 변형시켜 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다 보면, 나의 가을 하늘은 좀 더 온화한 감빛으로 물들어있지 않을까.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타고난 본능과 후천적으로 잉태된 염색체가 삶의 궤적을 통제한다. 염색체가 급격히 변하는 임계점은 사랑하거나, 사멸하는 순간. 그 둘 중 하나인지도. 하지만 나는 이 둘 모두를 택하고 싶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길지가 않으니까. 눈을 다시 떠야 한다.



덧. 집중호우가 지나고 다시 무더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비 피해 없으시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하시길 소망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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