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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해야 할 일.

강현욱 산문집.

by 시골서재 강현욱


반질반질한 감나뭇잎 사이로 맹렬한 여름의 빛이 따갑다. 날이 더워 몸살을 하는 나무들의 가지를 시원하게 잘라준다. 밀짚모자와 이마 사이에서 솟아나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간지럽다. 길어진 저녁의 나무 그늘이 따스하다.

나는 여름을 다하고 있다.

쿵. 어떤 서러운 것이, 어떤 단단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 그래서 듣기에 썩 좋지 않은 둔탁한 소리가 서재 외벽으로부터 갑작스레 솟아났다. 떨어진 가슴을 안고 진동의 근원지로 달려가보니, 화려한 수퀑 한 마리가 날아들어 건물 외벽에 대가리를 박고, 땅으로 추락해 죽어있었다. 나의 한숨은 스스로 서늘해진다. 이곳에 서재를 세웠기 때문인가. 날이 더워 방향 감각이 멸실된 것인가. 아니면 암컷을 상실한 것인가. 왠지모를 동질감 비슷한 감정이 섞인 측은한 마음이 내 안에서 걸려 넘어진다. 서늘한 음영이 드리운 반들반들한 눈동자는 끝내 진실을 토해내지 않겠다는 견고한 자세처럼 희미하게 굳어간다. 힘없이 벌어진 부리에서 가지런히 모인 말들이 굵은 침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다. 건너편 할아버지들께 말씀드려봐야 홍조 띤 설렌 표정들이 앞에 선연했기에 고개를 젓는다. 태워봐야 한 홉도 되지 않을 듯한 뼛가루가 서럽기만 하다. 삽을 들고 벚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비닐에 싼 녀석을 묻어주었다. 초라한 봉분이 하나 더 내 안에 생긴 것만 같은 황망한 기분. 생의 비밀을 품은 듯한 붉은 하늘이 산을 넘어 밀려온다.

삶의 부재인지, 무게인지 모를 인연과 헛된 말들에 시도때도 없이 어딘가에 머리를 들이박고 추락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니, 숱한 허언들이 웅성거리기도 했지만, 버릴 것 없는 추억들이 고조곤하기도 했다. 더 이상 덜어낼 말도 없는 기억들이 고요히 피를 흘리며 내 안에 속삭이듯 살아간다.

언젠가는 벚나무 아래에 소중히 묻어야 할 기억들.

당신의 부재에 기쁜 일은 기쁘지가 않았고, 슬픈 일은 슬프지가 않았다. 그 무엇도 필요가 없는, 존재도 없는 무의 공간, 허무의 공간이었으니까. 방향 감각은 망실되고, 목적성은 분실했다. 사점을 향해 수도없이 날아가 머리를 들이 받으며 생각했다. 그건 나의 잘못인가, 당신의 잘못인가. 아니면 부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하나의 공간에 우연히 섞인 것 때문인가. 무엇이 되었든 나는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유롭기 위해 무얼해야 하는 지는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스쳐가는 시간들에 그저 넋놓고 있지 않는다. 그 시간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온힘을 다해 부딪친다. 공허의 공간에 더 이상 감금되지 않도록 금과 틈을 만들어내고, 나의 영혼과 육신을 사이로 욱여넣는다. 언젠가는 구깃해진 나를 돌아보며 안도할 것이다. 마음을 다하지 못한 후회는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쓸모가 없는 거니까. 한 시절의 슬픔과 의지를 담아 최대치를 살아내던 구겨진 나만이 그곳에서 미소지을 수 있을 뿐이다. 좀 구겨지면 어떤가. 최선을 다했다면 괜찮지 않은가.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스탕달의 묘비명을 나의 묘비에도 부디 필사할 수 있기를.

당신은 마음을 다하였습니까.

매일의 나에게 묻는다.


덧. 지금 현재에 마음을 다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고개를 저어야만 했습니다. 매순간을 소중히 다루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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