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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당신의 사십 대는 안녕하십니까

by 시골서재 강현욱


마흔의 무렵에 나는, 나만의 정원을 쓰고 싶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시절을 서성이던 나에게 그것은 고요히 찾아왔다. 어쩌면 희망이라 불러야 할 막연한 욕망이었다. 그렇지만 욕망이라 하기에는 세속적이지 않은 듯했고, 그렇다고 초연이라 부르기에는 현실성이 짙은 그런 욕심같은 것이었다. 어떤 모양의 마음이었는 지를 잘게 분해해서, 개별적으로 설명할 재간은 지금도 나에게는 없다. 다만, 그건 아마도 내가 이십 대도, 삼십 대도, 오십 대도 아닌, 사십 대라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이유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으리라, 추측해 수 있을 뿐이다.

사십 대라는 의도하지 않은 시절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예전처럼 앞만보며 달려보고도 싶으나, 그 전과 같은 정신적, 신체적인 의욕은 상실했다. 문자를 해석하는 이해력도, 문제를 풀어내는 총명함도 분실했으며, 그렇다고 삶을 다시 고쳐쓰기에는 고착화된 일상의 목줄에서 벗어날 용기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정한 쉬리부터, 똑똑한 챗 지피티까지 새로운 기술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데, 익숙한 것 외에는 그저 불편함으로 다가올 뿐이다. 사고와 감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나이 어린 후배들의 시선이 그리 호의적이지만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 때문인지 선배들과 상급자들의 별 것 아닌 훈계가 눈에 거슬리고, 쓸모도 없는 자존심에 실핏줄 같은 살얼음이 끼기도 한다. 하지만 성에를 지워도 겨우 남아있는 건, 여전히 한 평도 되지 않는 자존심뿐인지라, 두 개나 달린 귀는 덮어두고, 하나 밖에 없는 입술만을 끊임없이 달싹인다. 허투로 먹어버린 나이와 허술하게 쌓은 경험을 무기삼아 남들 앞에 어쭙지도 않은 헛된 우월함을 설파하다가, 꼰대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이런 사십 대를 피해 나도 한 때는 있는 힘껏 도망치기도 했었으나, 이보다 더한 사십 대를 어느날 만났으니, 그게 바로 나다.

독주에 취한 호기로움은 아름다웠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연애는 순수했으며, 모든 걸 잃어버린 실패조차도 멋스러운 이야기가 되던 젊은 날의 한 시절. 한때, 나는 봄이었으며, 여름이었다. 그러나 이젠, 엉망으로 술에 취하면, 그다음 날 자기 경멸에 빠져 절망하고, 연애는 그늘과 얼룩이 묻은 자책으로 기대조차 하지 못한다. 실패가 두려워 조금의 용기조차도 내어보지 못하면서, 쓸데 없이 목뼈만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치졸한 자기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여름의 무심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나가버린 나의 계절은 뒤돌아서, 여전히 그 시절에 박제된 나에게 묻는다.

'너, 지금까지 무얼하며 살았나.'

내 마음 같지는 않지만,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들, 남아 있는 나날을 함부로 보내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들, 낯설기만 한 것들이 맹렬하게 추격해 오지만, 사십 대의 초입에서도 인파로 북새통인 거리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그저 쪼그려 앉아 훌쩍였을 뿐이다. 어둑해져 가는 길목에서 그 많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나의 그림자도 짧아져만 간다. 사라진 사람들을 탓해야 하나, 기울어가는 태양을 원망해야 하나. 이제 나는 어떡할 것인가. 무서운 불확실성이 하늘을 뒤덮는다.

8월. 나에겐 그해 8월이다.

키보다 작은 나무작대기 같은 벚나무와 자작나무, 목련과 매화나무를 땅에 꽂고서 남아있는 나날을 상상하던 그 해. 나만의 정원을 만들어 나무와 꽃들을 생육시키고자 했던 그 마음이 세월을 가로질러 다시 내 앞에 고요히 서 있다. 나는 왜 거리의 인파들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다 정원으로 나아갔을까. 인간의 몸 속엔 식물과 비슷한 염색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차에서 내려 정원에 발을 내디딜때, 한아름 달려드는 짙은 풀의 공기들, 코 끝에서 유혹하는 매혹적인 과일의 향기들, 바스락 바스락 속삭이는 보슬한 흙의 냄새들. 내 안의 피와 살들은 충만함과 평온함을 느끼며 꿈틀거린다. 마흔에 시작해 어느덧 마흔의 중간에서 생각한다. 여전히 정원을 가꾸기로 한 결심은 사십 대의 흔들리는 과녁을, 삶의 의미라는 궤적으로 다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사십 대를 계절에 비유하자면, 열정의 정점을 찍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하강하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씨앗은 모두 뿌려볼 수 있는 봄처럼,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계절도 아니다. 터질 듯한 청록이 산하를 물들이는 여름처럼, 열정의 질감이 부풀어 오르는 계절도 아니다. 모든게 헐거워지는 겨을처럼, 언젠가 하얀 눈에 덮혀 깨끗해질 시절도 아니다. 계절에 비유하자면 사십 대는 가을에 가까운 시절이 아닐까.

계절과 세계는 너그럽지 않았다. 매몰차게 흘러갈 뿐이다. 봄은 연둣빛으로, 여름은 녹빛으로, 가을은 감빛으로, 겨울은 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세계의 무자비한 섭리가 이마를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정원을 가꾸던 시간만은 모든 계절에서 아름답다. 호흡은 차분해지고, 눈빛은 온화해지며, 걸음은 반듯해 진다. 그건 아마도 고요했으나 열정적이었고, 인위적이었으나 자연스러웠으며, 어설펐으나 충만했고, 느린 듯했으나 무엇하나 놓칠 수 없던 시간과 마음들이 정원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고 삽을 들고서 정원을 향한다. 등날을 힘껏 밟아 물길을 내고, 굵게 자라게 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다듬고, 역동적인 호스를 꺼내 정원 곳곳에 물을 뿌린다. 간지럽게 피어나는 무지개 안에서 사십 대라는 다시 오지 않을 시절을 육안으로 확인한다. 비록 아무것도 아닌 일인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별 것 아닌 일 덕분에 주변을 맴돌던 허언들은 사라지고, 진심들과 고요함과 평온으로 바쁘기만 한 나날이다. 비록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손수 식물을 가꿔보길 추천한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책은 사십 대의 우아한 일상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가드닝의 정교한 기술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느 눅눅한 사십 대가 정원을 가꾸다가 함부로 뱉어낸 별 것 아닌 말들을 어찌하지 못해서 그저 주워담아 옮겨 적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알기 위해서.


- 2025. 8. 7. 입추, 시골서재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


덧. 지난해 겨울부터 생각만 하며 미루고 미루다 쓰기 시작합니다. 정원을 소개하고 가꾸는 사십 대의 마음을 담아보려 합니다. 어느 계절에나 아름다움은 살아있습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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