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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계절, 입추.

by 시골서재 강현욱


여름. 어떠한 말이나,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이름. 하지만 기어코 사라질 계절. 오늘은 입추(立秋)다.

풍성한 나뭇잎들이 저녁 바람을 간지럽힌다. 조금은 더 투명해진 바람이 불어오기에 시간과 공간의 질감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부풀어 오른 뒷산에도, 찰랑이는 들녘에도, 고요한 나의 정원에도, 알게 모르게 가을은 틈을 넓히며 스며들었다. 어제와 같은 햇볕이 없고, 어제와 같은 바람이 없으며, 어제와 같은 흙이 없다. 태양의 변화와 계절의 흐름을 나약한 인간이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객관화된 지표 중 하나가 이십사절기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달력의 숫자보다는 숫자 아래에 수줍게 표시된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들여다 보기를 좋아한다. 순박하지만 진실되고, 다른 시간인 듯하지만, 정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정원 일은 달력 아래 자그마하게 적힌 진솔한 언어에 대부분 의존한다.

- 벌써 입추구나. 조만간 가을 감자를 심어야겠네. 씨감자를 슬슬 준비해야겠어.

일을 하다 말고,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며 미친 것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을 누군가가 들었다면, 촌스럽다 여길 것이다. 입추에 흥분하다니. 하지만 보름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절기에 맞춰진 내 삶의 리듬에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햇볕의 채도와 명도를 따라 달라지는 이십사절기는 농사를 짓거나, 식물을 가꾸는 사람들에겐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조화롭게 살고자 한 옛사람들은 하늘을 높이 우러러보고, 땅에 부복(俯伏)할 줄 아는 겸손함이 있었다. 절기라는 걸 만들어 경이로운 하늘에 손 모아 기도하고, 은혜로운 대지에 입을 맞추며 씨앗을 뿌렸다. 그렇게 크지도 많지도 않은 욕심을 괜스레 미안해하며, 남몰래 풍년이 든 미래를 점치곤 했다. 이십사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인 입추는 교만한 인간을 위해 다시 찾아온 경외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또 다른 시작의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걸 잊은 지, 오래다.

나는 가을을 계절의 첫 번째 영광이라 부르곤 한다. 왜 봄이 아니라, 가을인가.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여겨질 때, 어느 순간 나타나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 이끄는 계절이 가을인 것만 같다. 영광스러운 손길에 몸과 마음을 한껏 의탁한다. 나는 봄으로 시작해 여름을 지나,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에만 할 수 있는 무수하게 널린 해야 할 일들을 살핀다. 해야 할 일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건 한 계절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삶을 의미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인 것이다.

의미가 있는 해야 할 일들은 모순적이게도 오히려 영혼의 자유를 가져온다. 비로소 가을의 향기는 고독이 아닌, 아름다움이 되어 뼈와 살을 채운다.

사실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정원에 무수하게 찍은 나의 흔적들이 나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오래된 안내에 따라 오늘은 가을 감자를 심어야 하기에 조금 일찍 잠에서 깨어야만 했다. 입추가 지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낮의 온도는 삼십 도를 넘어서고, 습도도 높아 공기 중에 물방울이 부유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건너편 할아버지들이 새벽빛에 기상해서 삽을 들고 일렬로 걸어가는 모습이 노년의 지혜이자, 삶의 정겨움으로 여겨진다. 가을이 슬며시 건네는 아침의 햇빛이 창틀을 조용히 넘어와 바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햇살의 시선에는 갓 볶아낸 원두커피의 냄새처럼 쌉쌀하고도, 무해한 향이 고요히 묻어 있다. 가을을 닮은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 묻은 얼굴로 나무들을 깨우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두나무야, 너는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굵어졌어. 살구나무야, 너는 잎들이 너무 무성해서 오늘 좀 깎아야겠다. 코스모스, 너희들은 밤새 꽃 피우느라 분주했겠구나. 따위의 혼잣말인데, 혼잣말이 아닌 말들을 진지하게 건넨다. 그럴 때면 무슨 끔찍한 농담을 하느냐는 듯, 물까치가 이슬이 매달린 투명한 초록빛 잎사귀들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른다. 토스트를 구워 지난 초여름에 만들어 둔 딸기잼을 바르고, 한입 크게 베어 문다. 달콤한 맛에 나른해지면서 조금 여유를 부려보고도 싶지만, 마음은 어느새 읍내의 농원에 닿아있다. 감자밭에 섞어줄 퇴비를 구해야 하고, 흙과 골고루 섞어 땅을 고르고 비닐을 덮어야 한다. 덮은 비닐에 이십오 센티미터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연둣빛 싹 눈이 일어난 감자를 하나하나 심어야 한다. 분주한 하루를 상상하며 생각에 잠긴다.

사실 가을은 당신들이 아는 것처럼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다. 가을은 잠시도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 계절이다. 다가올 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 지나간 시간에 남겨진 것들을 거둬들여야 하는 일들이 포개어지고 덧대어진 계절이 가을이고, 마흔의 시절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를 따라 흐른다는 건, '비발디'에게 가드닝이나, 농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정원 집사들에겐 가을은 결실의 시간이면서도, 다시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시절이기에 영광의 축포와도 같은 계절이다. 상급 학교로 진학하던 날의 설렘, 이직 후 첫 출근을 하는 아침의 긴장, 매년 새해의 처음이 주는 보석 같은 다짐들.

기울어 간다, 여겼으나,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뜻밖의 선물 같은 계절이 가을이다.

농원으로 달려가 흙의 영양을 보충해 주기 위해 거름을 골라본다. 흙도 모양이 제각기 달라서 퇴비로 달래기도 하고, 낙엽으로 간지럽히기도 하고, 휴식할 수 있도록 안과 밖을 뒤엎어주기도 한다. 복합비료가 좋을까, 퇴비가 나을까. 석회를 가득 뿌려볼까.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모두 섞기로 결심한다. 항상 이런 식이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흙은 아주 소중한 것이니까. 사람들은 흔히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의 존재에 대해서는 우수에 젖은 시선이 되거나, 찬양하는 눈빛이 되어 노래하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흙에 대해서는 사실 조금의 관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땅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존경하지 않으며, 발 아래에 밟힌 묵묵한 흙을 단 일 초도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흙은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끝끝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다. 영화 '파묘'에서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김상덕'이 흙을 찍어 맛을 보는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인간의 혀는 가장 민감하고, 외부 물질의 몸 안으로의 진입을 허락할 권한이 있기에 본능적으로 인간은 혀를 감추고 아낀다. 아주 사랑하거나 소중한 것, 좋은 것에만 자신의 혀를 내어주는 것이다. '김상덕'은 분명 흙을,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사랑하는 캐릭터였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더 높이 날고 싶다면, 최소한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으며, 어디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가장 근본적인 것을 향한 고마움이 당신의 비상을 축복할 것이다. 대지의 풍요로움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원에 갈 때마다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시간의 흐름을 잊곤 한다. 김장배추 모종이 벌써 나왔다며 호들갑을 떨면, 농원 주인은 어느새 다가와 나를 끌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자랑하듯 보여준다. 가을은 역시 국화라며 지금 심어두면 9월에는 꽃이 만개할 거라고, 아스타 화분을 보여주기도 하고, 앙증맞은 폼폰을 권하기도 한다. 늦지 않게 배추 모종을 심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식물을 키우는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진솔함과 순박함이 있어, 그녀의 말 속에는 어떠한 얼룩도 없다. 깨끗한 언어에 이끌려 결국 쪽파 종구들과 국화에 탐심이 일어, 두 손 가득 들고서 농원을 나서야만 했다. 이걸 언제 모두 심을 수 있을까. 한숨을 쉬며 슬며시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녀석들이 온몸을 흔들면서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를 걸 생각하면, 그냥 좋을 뿐이다. 농원을 나서는데 바삭한 햇살에 살며시 기분이 고양되었다.

- 감자 심기에 참 좋은 날이구나.

마흔의 중간에 선 나는 여전히 젊은 어느 날의 나처럼, 직선으로 달린다고 여기지만, 매일을 휘청거리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날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렸기에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너무나 깊은 것들을 이젠 느리지만 알아갈 수 있음에 지금의 시절에 감사할 수 있다. 삶이라는 길 위에 있는 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낭에 넣어 걸어야만 조금은 더 자유롭게 멀리 날아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익어갈 가을이 기다려진다. 봄과 여름에 피워낸 꽃들이 붉고 화려하고 뜨거웠다면, 가을에 피어날 꽃들은 돋보이진 않지만, 그만큼 성숙하고, 고요한 견실함이 있다.

가을이다. 가을의 시간은 깊고 은은해서 사람을 할퀴지 않는다. 가을의 공간은 화려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사람을 현혹시키지 않는다. 마흔에 쓰는 정원은 가을을 닮아간다.


덧. 일터의 일이 너무나 바쁘게 흘러서 매주 금요일에는 반드시 글을 발행하겠다는 저와의 약속을 결국 못지키고야 말았습니다. 속이 좀 상하기도 하지만, 정원을 가꾸고 소개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시간과 이 공간이 행복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기분이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잔잔하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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