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꽃들이 시들고야 말았다.
무심한 장맛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시간은 덧없이 흘러버렸다. 생각은 여름의 하늘에 부딪히고 주저앉았다. 아니, 갇혀버렸다. 가을 하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구름 너머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그것은 맑았다. 처서의 아침 공기 속에 건너편 할아버지가 고요히 서 있다. 무표정한 햇살 아래에서 햇볕처럼 표정이 없는 시선으로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걸까. 아니면 어떤 기도라도 드리는 걸까. 저 시선의 끝엔 무엇이 닿아있을까. 무엇이 되었든 나처럼 필사적으로 나를 타이르고 있지는 않을 듯하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꿔 온 사람들의 마음이란,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이젠 잘 알고 있으니까.
비가 내려야 할 텐데, 아니면 비가 내리지 말아야 할 텐데. 바람이 불어야 할 텐데, 아니면 바람이 그쳐야 할 텐데. 겨우 이런 유의 간명하고 깨끗한 기도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실체가 나약하지만, 고요하다. 욕망이라 하기에는 소박하고, 욕구라 부르기에는 개인의 경계를 벗어난다. 그것이 욕망이 되었든, 욕구라 부르든 나의 번민을 향해 도무지 무심하기만 한 정원 앞에서 스스로 안도한다. 정원은 나를 평가하지도, 분석하지도, 질책하지도 않으니까. 정원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정원이 전해주는 충만함과 편안함이 내 안에서 넓어질수록 욕망과 욕구의 자리는 반비례해서 좁아지고, 그만큼을 또 비례해서 결핍은 희미해져 간다. 턱을 괴고 다가오는 바람을 가만히 응시한다. 선선한 바람은 귓바퀴를 떠돌다 입술을 움직인다.
- 나에게도 수많은 욕망들이 자욱하다. 하지만 그건 아득하기만 한 썰물같은 것이다.
질감도 없고 형체도 알 수 없는 욕망을 내려놓고, 연둣빛이 알알이 박힐 배추밭을 일구며 곰곰히 생각한다. 사십 대라는 시절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 차마 놓을 수 없는 여름의 열정과 환상같은 것들을 덧대어 잇는 것일까. 꼭 쥐려할 수록 빠르게 흩어지는 모래알과 같은 욕망을 덧없이 움켜쥐고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와 같은 시선으로 가을이 시작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만큼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별탈 없이 하루가 지나가길 바라는 기도. 가을의 바람은 사실 그게 전부다.
가을은 세월처럼 멀리서 다가와서, 가까이에서 짙어진다.
오늘은 절기상 처서(處暑)다. 이십사절기 중 열네 번째 순서인 처서. 계절의 중반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주는 절기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이 타오르던 더위도 점차 누그러지고 청명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처서는 자연의 지고지순한 순행을 의미한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처럼, 가을이 바짝 당겨 앉았음을 오감으로 실감할 수 있는 시기이다. 처서가 지나면 거침없던 태양도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풀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에 사람들은 조상을 찾아 벌초한다.
- 이제 잡초 좀 뽑아라. 이래서야 가을꽃이 자라겠나.
- 네. 더 늦지 않게 뽑으려구요. 더 늦으면 뽑아야 할 이유도, 뽑아낼 수도 없을 테니까.
나 또한 뜨거웠던 여름동안 하염없이 자라나, 쓸데없이 거대하기만 한 환삼덩굴과 잡초들을 베어내며 가을을 시작한다. 허황되게 부풀어 오르고, 결실도 없는 무의미한 잡초들에게서 고개를 치켜든 여름날의 욕망들을 발견한다.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낮게 태어나서 어느새 나무를 높이 휘어감은 덩굴을 제거하지 않으면, 따뜻한 가을볕에도 나무는 더이상 자라지 못하거나 끝내 고사하고야 만다. 쇠비름, 바랭이, 여뀌, 그나마 귀여운 강아지풀. 이것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름 안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거대하고, 끈질기다. 그대로 두면, 결국 남은 계절을 집어삼킨다.
까까머리일 때는 이십 대와 삼십 대가 되면 자유롭고, 사십 대가 되면 강건하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자유롭지도 강하지도 못하다. 그건 내가 가진 것에 뒤따르는 무료함과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향한 욕망때문이다. 욕망은 남았으나 열정과 꿈이 사라진 사십 대의 허망함을 자위하는 건, 가진 것을 수호하려는 자세. 보수(保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강하지도 못해서 온전히 지켜내지도 못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관계이고, 느닷없이 부딪치며 달려오는 것이 삶이니까. 그래서 수도없이 흔들린다. 신념에는 살얼음이 끼고, 마음에는 금이 가고, 사람을 향한 믿음은 깨어지고, 깨진 조각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건 허망함과 두려움이다. 물질적 탐욕보다는 정서적 충만감이, 빼앗길 수 없다는 집착보다는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열정이, 군중 속에 둘러싸인 순간적 쾌락보다는 고요함이 필요한 나이가 사십 대이고, 가을이라는 계절인 듯하다. 그리고 정원 일은 마음 속 외진 길을 걸어가며, 스스로를 타이를 수 있게 나를 데려간다.
작은 정원이라도 가꾸어야 하는 이유다.
잡초들을 뽑고 난 자리는 흙빛만 가득하다.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은 것만 같은 기분에 결핍이 일어선다. 과하지 않고, 볼품없지 않을 만큼 조금 욕심을 부려본다. 짝짓기가 한창인 잠자리들과 들꽃이 가득 피어난 둑길을 지나 읍내 농원으로 달려간다. 농원에는 여전히 성숙한 여름꽃 모종이 가득해서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여름의 꽃은 언제나 매혹적이고,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여름꽃의 씨앗을 다시 뿌리거나 모종을 심을 수는 없다. 수더분한 가을꽃 모종과 겨을을 견디고 봄에 피어날 꽃씨를 뿌려야 한다. 여름꽃이 화려하고 어여쁘다 해서 여름꽃 모종을 심을 수는 없는 일이고, 타인의 정원이 아름답다 해서 같은 나무와 꽃을 심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은 하늘이 없고, 같은 땅이 없으며, 같은 바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땅에서 나의 하늘빛으로 나만의 가을 정원을 가꾼다. 타인의 정원은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류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름꽃 모종에서 시선을 거두어 가을꽃 모종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보들보들한 분홍빛 핑크뮬리, 소담한 헬레니움, 단아한 구절초. 나의 정원에서 살아가는 아스터, 그리고 코스모스와 조화로울 듯하다. 가을꽃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수줍은 들꽃의 향기를 가졌다. 그래서 살며시 고양된다. 풍만하고 온화한 농원 주인은 배추와 봄동 모종도 보여준다. 무언가를 나누어 가진 것만 같아 그녀에게 다사로운 감정이 일어난다. 농원 주인의 입담에 겨울의 정원을 상상한다. 소복하게 덮힌 눈을 조금 걷어내면 연녹빛들이 전구처럼 불을 밝히고 일어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눈꼬리가 가늘어진다. 올해는 봄동이 좋을 듯하다.
고요하고 떳떳하게 지나갈 겨울을 위해서.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어쩌면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 오늘은 처서다. 처서 무렵은 사실 한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가을로 진입했다고 해서 모든게 끝난 게 아니다. 햇살은 금빛으로 물들어야 하고, 바람은 시원해야 한다. 가을 작물이 솟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자랄 수 있게 인간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무렵 몇날 며칠 비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치거나, 호우가 찾아오면 그동안 애달프게 가꾸어 온 인간의 땀은 헛되게 된다.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라고 하는데,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든 쌀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처서에 비가 내리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며 시간에 기대어 정원가의 손이 멈춘다면 가을꽃 뿐만 아니라, 이듬해 찾아올 봄의 기척이 그리 생기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썩어버린 잡초들의 잔해 속에서 씨앗을 뿌려두지 않은 꽃은 어디에서도 피어날 수 없다. 봄에 꽃을 피우려면 땅 속에서 뿌리를 내려 봄이 오기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원가의 가을은 그래서 한가하지 않다. 정원가가 준비한 이듬해의 봄을 지나가는 자는, 지난 해 가을의 정원가를 기억할 것이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었군. 꽃을 사랑한 사람이었군. 하며 말이다.
살아온 삶의 의미는 나의 몫이 아닌 남겨진 자의 몫이다.
결핍으로 인한 슬픔과 욕구의 충족으로 인한 공허함의 경계에서 그나마 인간은 잠깐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그 경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인간은 순간의 쾌락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매일 시도한다. 쾌락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한게 아니라,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단지 경계에서 저울을 유지하며 평온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행복과 평온은 동의어일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근원적 비참함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사십 대의 나는 평온을 위해 정원 일과 글쓰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쫓아오는 직장의 일과 인간관계 속에서 순간적인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정원 안에서 마음의 평온을 가꾼다.
정원은 아무리 가꾸어도 완성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불완전한 우리의 삶과 닮았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정원은 고요하고, 이것은 허약해 보이지만, 사실 강하다.
마흔의 강건함은 고요함 속에 있다.
덧. 추석연휴는 잘 보내셨습니까. 길었던 연휴 덕분에 저는 정말 오랜만에 산문을 끄적일 수 있었습니다. 정원 일과 글을 쓰는 일은 꽤나 많이 닮은 듯합니다. 느리고, 정적이고, 고요하고, 주체적이고. 그래서 인간의 존재적 소외가 흐려지게 하는 힘이 있는 듯합니다. 글밭과 텃밭. 어떤 모양이든 함께 잘 가꾸어 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작가님들의 글밭을 고요히 응원합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