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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

제3장. 삶.

by 시골서재 강현욱


첫 눈이 내리길래 술을 마시다 말고 대구역으로 달려갔어 첫 눈이 내리면 여수행 야간열차에 함께 오르자던 누군가와의 약속을 쫓아야만 했으니까 열차표를 끊어야 하는데 불콰한 얼굴의 노숙자만이 역사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었어 요즘은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고 지루한 표정의 역무원은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리더군 여수행 열차는 역무원의 말처럼 텅비어 있었어 차창 밖에는 미친 것처럼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취기때문인지 나의 눈꺼풀도 쏟아져 내렸어 오랫동안 터널을 달린 것인지 내가 잠이 든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어 명멸하는 형광등 불빛에 눈을 떠보니 내 옆에는 낯선 여자가 죽은 것처럼 자고 있더군 깨어난 여자에게 말을 걸었어 어디로 가시나요 여수로 가요 약속을 지켜야해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플랫폼에 서서 우리는 어디선가 말 소리가 들리면 그 쪽을 쳐다보고 누군가의 발 소리가 들리면 이 쪽을 쳐다봤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받아들인 낯선 여인과 나는 깨진 네온싸인이 흉측하게 번쩍이는 여인숙으로 들어갔어 멀리서 열차 소리가 들려오면 심장이 요동치는 것처럼 창문은 격렬하게 흔들렸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온 배고픈 짐승처럼 우리는 몇 번이나 서로를 서성였어 내년에 첫 눈이 내리면 우리 여수행 열차에 함께 올라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어 이게 작년의 일이야 그 후로 감기 몸살이 번갈아 찾아오며 어느새 일 년이 흘렀더군 다시 첫 눈이 내렸어 또 오셨네요 여수행 열차표를 끊는데 여전히 하품을 하며 역무원은 표를 건네더군 그럼에도 아무도 없는 열차에 다시 올라야만 했어 약속을 쫓아다니느라 내가 죽은 건지 산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어 열차표를 검사하려고 다가오는 역무원이 아득하게 보이더군 옆자리에 올려둔 나의 가방을 나는 슬며시 나의 무릎 위로 가져와 눈을 감았어 잠이 들면 안된다고 다짐하면서도 말이야.


덧. 수많은 말들이 자욱한데 대부분 실체가 없으니 허황되고 결국 말은 자신의 말에 갇히는 듯합니다. 그런 말들을 잘라내고 나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어쩌면 침묵과 행동이 실체가 있는 언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시골서재를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알찬 추석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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