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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선, 정원의 시간 하나.

by 시골서재 강현욱


정원은 나를 혼자이게 한다. 그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조금은 길고, 또 조금은 짧은 시간동안 9월의 하늘은 엎드려 있었다. 꿈에서 일어나듯, 오랜만에 하늘은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개었다. 퍄란 가을 하늘에서 새어나오는 금빛 햇살은 부드러웠고, 자두나무 잎사귀 사이를 고요하게 간지럽혔다. 현관 문을 열고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깨끗한 공기를 조금도 놓치지 않을 듯이 크게 들이마신다. 공기는 순하고 무해하게 나를 관통한다. 현관 앞에 놓인 빛바랜 평상의 결을 따라 손바닥을 펴 쓸어내린다. 맞닿은 면을 따라 미세하게 건너오는 온기가 내 안에 감돈다. 머지않아 이 열감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듯 잎사귀를 떨군 나무들도 차가운 계절 속으로 자 걸어가야 할 것이다. 겨울은 시간의 흐름이 중지된 듯하지만, 나무들은 언제나 그렇듯, 각자의 공간에서 알게 모르게 성장한다. 흔히들 나무들이 겨울잠을 잔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다.

그들은 에서 다가올 봄을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하니까.

나 또한 무척이나 분주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분 단위를 세며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난하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인간관계를 헤매이며 사람들을 만나느라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의 사람들은 오히려 수렴해 가야한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시간도, 에너지도, 심지어 감정까지도 줄어드니까. 서로의 늙어감을 말없이 바라봐 줄 이들이면 충분하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군중 속을 오랫동안 방황하지만, 결국 돌아와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이미 늦어버린 자신과의 화해일 뿐일 테니까. 조금 속상하기도 하지만, 직장의 일이 려 올 때면,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정원일은 멀어지고, 직장의 일이 빠져나가면 다시 정원과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반복한다. 온전히 정원일과 글쓰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의 글감은 코스모스처럼 이렇게나 많이 피어있는데.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 나를 다독이며 시간을 분절한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정원일의 교집합은 고독에 있다. 그리고 고독의 시간들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그건 많든 적든 소롯하게 이어진 내 안의 길을 걸으며, 사색하고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니까. 무의미하게 사라져도 무방하리라 믿었던 것들이 정원 안에서. 그리고 문장 안에서 발견되고, 의미의 심지에 불을 당긴다. 빈약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서 불안하기만 한 사십 대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정신적 충만함과 강건함이다. 착하다는 말을 어떤 표창처럼 갖고 싶어 나를 속이고 타인을 의식하며 요란하게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잘라내야 한다. 요란함은 수렴되지 않고 퍼져 나가니까. 타인과의 비교와 갈등은 끝이 없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불필요한 외부의 충격을 차단하고, 내 안의 나와 대화를 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나를 데려가는 것이 정원일의 즐거움 중 하나다.

정원 일을 할 때는 주머니가 깊고 넓은 바지를 즐겨 입는다. 캥거루 주머니를 닮은 포켓 안에는 노끈과 전정 가위, 그리고 망치가 자리한다. 그들의 중량감을 안고서 정원의 이곳 저곳을 살필 때면, 나는 거침이 없어진다. 마치 든든한 친구가 나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주머니에 친구들을 넣고 정원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계절 속으로 혼자 떠난다. 평상 위로 길게 뻗어 연약한 그림자를 드리우곤 있으나, 감나무 가지 중 한 갈래는 이미 죽었고,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전에 톱을 꺼내 잘라낸다. 감나무 가지는 굵어보이지만, 속은 비어있어서 쉽게 부러진다. 어릴 적 나무에 오르다가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다는 이야기들은 감나무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두 갈래로 넓게 뻗었으나, 결국 한 갈래는 죽어버린 늙은 감나무. 홀로 남은 가지에서는 여전히 빛나는 잎사귀가 자라고, 주홍빛 감들이 알전구처럼 정원을 밝히고 있다. 감나무 잎은 어느 해보다을 것이고, 밝을 것이다. 속 깊이 길어올린 양분과 수분이 모두 한 가지로 흘러갈 테니까.

이제는 홀로 겨울을 지나야 한다.

야자매트가 깔린 정원 길을 따라 조금 걸어나오면 복숭아 나무가 허리를 굽히고서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다. 복숭아 나무를 볼 때면, 가끔 생각에 잠기곤 하는데, 아마도 그건 복숭아 나무 향한 태생적인 애틋함과 현존하는 연민의 감정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전, 복숭아 나무를 처음 심을 무렵, 나는 잃었고 앓았다. 나의 일상은 무너지고 있었고, 비록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었지만, 그 일상을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자그마한 복숭아 나무와 나는 한 밤에 마주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았으나, 많은 말들이 달빛을 따라 부유했고, 부딪히며 흩어지다, 다시 하나로 흘렀다. 말들은 적요 안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한 시절을 나와 함께 견뎠기에 그런 복숭아 나무가 애틋하다. 그래서인지 시절 함께 해 준 이들을 만날 때면 복숭아 나무가 떠오르곤 한다. 매년 무거운 복숭아를 매달아서인지 나무는 하늘을 향해 팔을 뻗지 못하고 옆으로 퍼지는데, 그 마저도 지탱할 힘이 약해서 지줏대를 세워 가지의 고단함을 줄여 주어야 한다. 연분홍빛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그게 마치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는 모습처럼 보인다. 사랑의 댓가인가. 누군가의 고단함을 복숭아 나무에서 본다. 복숭아가 익어서 떨어지면 황톳빛 바구니에 주워 담아 벌레가 먹은 부분은 도려내고 껍질을 깎아 먹는다. 무거웠던 만큼, 결실은 달콤하다. 다시 찾아 올 여름을 위해 가지를 잘라주고, 노끈으로 묶어 늘어진 가지를 받쳐준다.

굽었기에 복숭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고, 연민의 감정은 복받치는 것이다.

복숭아 나무 옆에는 하얀 아치가 정원길 양 옆으로 솟아 있는데, 아치를 감으며 머루나무 두 그루가 양 쪽에서 자라고 있다. 암수 한 쌍을 심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둘은 아치를 따라 자라다가 올해 드디어 손을 맞잡았다. 내년이 기다려지는 머루나무를 갈라놓으려는 듯, 환삼덩쿨이 둘을 감아버렸다. 전정가위를 꺼내 얽히고설킨 덩쿨들을 주의깊게 잘라준다. 여기까지 오면, 이미 나의 모든 사념들은 뒤로 사라지고 없다. 사실 정원일은 워낙 분주해서 잡념을 떠올릴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람과 새의 지저귐과 풀벌레 소리가 햇살 사이로 스며든 정원에서 감정은 정화되고, 번뇌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빨아 햇살 아래 널어둔 하얀 이불보의 반짝임도 이와 비교할 순 없을 것이다.

아치를 지나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목련 한 그루가 꼿꼿하게 자라고 있다. 목련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윤기나는 풍성한 목련 잎을 만질 때면, 무서운 불확실성 위에 세워둔 지팡이의 형상에 가까웠던 목련이 떠오른다. 아무 것도 없던 흙바닥 위에 모세의 지팡이처럼 홀로 서 있던 목련. 목련과 나는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모세의 기적처럼, 여기까지 도달했다. 목련이 질 때의 처참함 때문에 건너편 할아버지들은 목련을 심는 나를 만류하셨었다. 하지만 나는 목련에게서 생을 다하는 순수한 사랑의 의지를 보곤 한다. 목련은 뜨거운 심장이다. 꽃잎이 누렇게 바래고 투둑하고 떨어질 때면, 최선을 다해 붙들다 끝내 놓아준 자의 비장한 결심을 보는 듯해서 뭉클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꽃잎이 지고난 자리에는 도톰한 잎들이 다시 반짝이며 솟아난다.

비록 참하게 낙화했으나, 목련의 심장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실 나의 정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 위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외면할 수 없는 현실들이 안개처럼 자욱했었으니까. 헛된 말들과 거짓된 말들은 적막 안에서 속죄하듯, 침묵의 언어가 되었고, 침묵은 나를 고요하게 벼리었다. 관계로 인한 갑작스러운 충격은 삶의 의지를 상실시키고, 마음에 차가운 바람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문득 암전시킨다. 정원은 그런 나의 불빛을 밝혔다. 정원은 집사의 불빛이 꺼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생존과 변화를 요구하고, 의지를 강요한다.

정원은 흔들리는 사십대의 시절을 붙잡는다.

목련과 매화나무 사이에 무섭게 자라난 잡풀들이 거슬려 지난 주에 모두 뽑아버렸다. 휑하게 남아버린 땅이 아쉬워 이곳에 무엇을 심으면 어울릴 지를 쪼그리고 앉아 고민한다. 이런 우아한 고민은 정원가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백합 구근을 작년에 심었었는데, 매년 정원의 여름을 크고 아름답게 달군다. 백합의 매력이 떠올라 백합류의 구근식물을 심으려 한다. 가을 파종을 통해 봄이 오기 전까지 중력을 향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중력을 거슬러 봄이 오면 새순을 올리고, 여름이 되면 화사한 꽃을 피울 것이다. 구근을 살펴보다, 무스카리와 수선화, 그리고 튤립 구근을 주문한다. 구근이 도착할 때까지 다가올 봄과 여름의 정원을 상상하느라, 가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을 것이다. 혼자서도 웃을 수 있는 정원가의 행복. 외부의 충격에 따라 웃고 울기에는 이 계절이 아쉽다. 그런 단순한 사실을 여때껏 왜 깨닫지 못했을까.

사십 대의 시절은 홀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덧. 산문을 쓸 수 있어 좋았습니다. 글감이 코스모스처럼 널려있는 가을입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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