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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십 대 정원가의 의식의 흐름.

by 시골서재 강현욱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내면의 사유가 사십 대에겐 필요하다.

10월이 지나간다. 정원가의 눈에 비친 가을은 다채롭고, 은밀한 아름다움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빛 이삭들, 비밀을 감춘 듯한 은은한 물안개, 몸을 말아 구르는 마른 낙엽들,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들, 헐거운 세상들과 그 사이를 덧대는 감상들. 감상들 안에 각자의 은밀한 아름다움이 자리한다.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은 계절에 나는 비로소 서 있다. 청춘도, 사랑도, 우정도, 열정도, 시계를 돌려도 돌아갈 순 없지만, 시절의 나를 가만히 데려오는 시절이 가을이다. 여름 안에서 내가 보았던 세계는 모든 만물이 생기로 타올랐고, 목숨이 활어처럼 펄떡였으며 선명했다. 나는 그 안에서 현재를 추앙했으며, 여름의 일부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가을은 자연과 사람을 분리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가을 앞에서 자연을 관조하며 단독자로서 고독한 존재가 된다. 모든 것들이 말라가고 시들어가며 끝내 사라지는 계절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듯하다. 인간에게 작아지고 겸손해질 것을 자꾸만 강요하니까. 그럴때면 어떤 관념적인 광채가 하늘을 찢으며, 나를 내리쪼인다. 어떤 의식(儀式)을 치루는 것도 같은데, 나를 관통하는 빛에 생각에 잠기고, 빛을 따라 시간을 회고한다.

지나간 시간과 유예된 시간 속에서 사십 대의 의식(意識)의 흐름 시작된다.

정말 조용하구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커피 한잔을 내려 헐거워진 풍경을 바라본다. 폭죽처럼 터질 듯한 자두나무와 벚나무의 도톰한 잎사귀들도, 하늘을 찬미하던 백일홍과 코스모스도, 그칠 줄 모르던 매미와 개구리의 울음소리도, 안팎으로 뛰어오르던 붕어들의 물보라도. 영겁의 시간을 함께 지날 것만 같던 존재들은 어느새 하나, 둘 사라지고 곁에 남아있지 않다. 사라질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사실 모른 척 해왔을 뿐이다. 남아있는 건, 이가 여럿 나간 삽 한 자루를 든 어물쩡이는 사십 대의 정원가와 빗자루를 뒤집어 꽂아둔 듯한 모습의 나무들뿐이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삽을 들고서 정원의 경계를 향해 걸어간다. 정원이 멀어질수록, 언덕이 가까워질수록, 한 숨은 깊어진다. 정사각형 정원의 한 면은 낮은 언덕과 맞닿아있는데, 언덕과 정원의 경계에는 자작나무들이 자란다. 겨울철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가 나름 볼만하다. 하지만 혹독했던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나의 자작나무들 중 한 그루가 뿌리가 뽑힌 채, 죽어버렸다. 나의 자작나무라 할 수 있는 건, 내가 심었으며 지금껏 보살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의 장미꽃과도 같은 것이다. 마음을 허락한다는 건, 의미없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며, 그만큼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된다는 점에서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두려운 일인만큼 사십대가 지날 수록 마음을 누군가에게 허락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바쁘다는 핑계로 여름동안 자작나무를 소홀히 했다. 자작나무를 잊었고, 언덕의 경사를 가벼이 여겼다. 삽을 잡지 않았고, 곡괭이를 들지 못했다. 집사를 나무라기라도 하려는 듯, 자작나무는 알게 모르게 잡초들에 감겨 병들어 가고 있었고, 경사를 따라 쏟아지던 물살과 흙더미에 결국 쓰러지고야 말았다. 죽음은 살면서 유일한 운명이고, 유일한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각오도 되어있지만, 여전히 예기치 못한 죽음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나는 머뭇거린다. 삶은 꼭 이렇게 불확실한 얼굴로 다가와야만 하는가 하는 막연한 의문들. 외적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애를 쓰며 살아가지만, 내가 마음을 주었던, 그게 멸실이든 망실이든, 어떤 존재의 상실은 삶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들을 뱉어내게 한다. 톱을 가져와 죽은 자작나무를 장작 크기로 잘라, 울타리처럼 화단 경계에 꽂아둔다. 아마도 볼 때마다 죽은 자작나무가 생각날 것이고, 자작나무를 심었던 그 때의 마음이 소환될 것이다. 아련한 고통도, 희미한 기쁨도, 마음에 무언가를 허락한 나의 책임인 것이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자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나아가야 하니까. 후회 속에 미래는 없으니까.

지금 정원에 꽂혀있는 빗자루 같은 나무들은 사실 나에겐 철학자이자, 스승이자, 친구이며, 애틋한 사랑의 대상이다. 나는 나무를 찬양하고, 숭배한다. 나무들을 볼 때면, 니체나, 반고흐처럼 고독했으나 위대한 삶을 살았고. 삶을 남긴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와 함께 영원을 살아간다. 남아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여전히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이와 같은데, 나무는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 고독과 견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스스로 만들고 자신 안에 간직한다. 나이테 안에 그들의 이야기가 기하학적으로 쓰여 있다. 생육이 왕성하고 가장 화려할 때에는 굵은 나이테가 그려진다. 혹독한 날씨와 거센 태풍이 지나갈 때면, 안간힘을 쓰면서 견디느라 나이테도 가늘어진다. 묵묵히 견디며 그들은 독자적이고 의연한 모습으로 수백 년씩 삶을 이어간다. 가끔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관계에서 지칠 때면 나무를 한참동안 바라보곤 하는데, 그들이 꼭 무슨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그 말들은 개별적으로 소분되는 언어들은 아니다. 그저 평온은 내 마음 안에 있다는 어떤 단정한 호흡같은 말들이다. 삶의 근원적인 비밀과 법칙을 알려주는 철학자이자 스승이 나에겐 수십 그루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가는 나무와 꽃들로부터 철학을 배우고,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인지도.

자연은 인간에게 최고의 스승이다. 인간은 그걸 자주 잊고 살아간다.

10월이 되었지만 포근한 기온 탓에 봉선화가 미친 것처럼, 배나무 아래에서 여전히 싹을 틔운다.

이러면 안되는데. 내년에 새순을 올려야 하는데.

꽃도 피워보지 못할 씨앗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번지는 철없는 새순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말 그대로 철이 없는 것이다. 누가 꽃말을 지었을까. '아이같은 마음씨'라는 봉선화의 꽃말이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정원의 아이들이 들려주는 예상치 못한 생(生)의 노래들에 가만히 귀 기울일 때면 마음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건 삶을 향한 결심이라는 생각. 세상이 듣지 않는 수많은 아이같은 말들이 우리 사이에는 가득하다는 기분. 언제든 나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내 안의 나를 돌보겠다는 의지같은 것들이 많든 적든 섞여서 흘러간다. 나이가 들수록 무참하게 흐르는 시간 앞에서 아무데서나 마음이 툭툭 꺾일 때가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친분이 깊지 않은 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시간에 휩쓸릴 때면 세월의 비정함이 느껴지곤 한다. 사십 대가 기껏 나누는 대화들 따위는 승진, 주식, 아파트, 아이들의 대학교와 직업같은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들이 대부분이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 하고 싶은 일들, 배워보고 가보고 싶은 것들. 자신의 이야기들은 그 안에 존재할 자리가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없으니, 다른 이야기들로 삶을 채우고, 그건 결국 허무함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대부분 이런 류의 대화에서 무료함을 느끼고, 이 시간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분 탓에 시간의 무참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꽃을 피울 수는 없겠으나, 철 없는 봉선화와의 대화가 나는 훨씬 흥미롭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기록하는 지금의 이 순간과 행위가 시간을 오롯이 지켜낼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안다.

얼마 전에 주문한 튤립과 수선화와 무스카리 구근이 도착했다. 앙증맞은 마늘처럼 생긴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근육이 당겨지며 미소가 생긴다. 식물을 볼 때면 크고 찌르는 듯한 웃음이 아닌 잔잔한 미소가 생기곤 하는데, 나도 모르게 생기는 이런 미소가 스스로 만족스럽다. 휑뎅그렁하게 비어있는 곳에 이 녀석들을 심으며, 다가올 정원의 봄을 상상한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릴 때는 특히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건 아마도 삶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순환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씨를 뿌리는 행위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삶은 안타깝게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같다. 중요한 건, 싹을 틔우고 계절을 지나는 동안 남겨지는 의미들이다. 가끔 식물원에서 마주한 수선화는 소박하지만 감미로웠다. 그 향기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순 없겠지만, 굳이 나타낸다면, 고향이나 어머니가 되지 않을까. 수선화의 꽃말이 자기애, 고결한 사랑,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 죽고, 그 곳에서 자라난 꽃이 수선화라 전해진다. 타인을 향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르키소스도 자신을 사랑한 힘으로 결국 타인들에게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잃지 않는 일, 어쩌면 사십 대 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거쳐 필요한 일인지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거창하고 특별해야만 하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지켜야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켜야할 것에 자신을 절대 빠트려서는 안된다.

모든 감각과 감정을 동원해 정원일을 하며 현재를 느낀다. 내 영혼의 감미로운 평온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한다. 기록할 때면 모든 기억과 감각이 나이테처럼 또렷해진다. 사랑과 기쁨과 충만했던 순간들, 한편으로는 슬픔과 상처, 왜곡과 오해들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런 상처들과 왜곡과 오해가 있었기에 또한 한 시절을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나이테가 내 안에 자리하고, 마음으로 태어난 말들은 나의 노트를 지나가고 다시온다. 눌러쓴 희소한 말들을 들여다본다. 가슴으로 채울 수 있는 것들은 희소하다. 희소하기에 애틋하다. 마음의 에너지가 줄어드는 사십 대에겐 더욱 희소해지는 언어들. 나 아닌 희소한 나를 보게 되는 가을에 서서 기도한다.

나의 남아있는 나날이, 부디 가슴으로 그려진 수많은 나이테이길.

정원가가 갖는 어느 하루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건, 겨우 이런 것들뿐이다.

무스카리 구근

덧.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인 만큼, 건강도 꼼꼼하게 잘살펴야 할 계절입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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