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일을 하다말고, 늦가을 햇살이 좋아 그저 논두렁을 걸었다. 머리를 바싹 깎은 논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덧없는 감상에 젖어있던 사이, 일렁이던 녹빛들을 어느새 찬연한 금빛이 대신했다. 밤을 낮처럼 여기며 완강하게 노래하던 개구리들도, 논 사이를 맹렬하게 추적하던 백로들도, 공기에 숨어있던 시큼한 물비린내도. 모두 사라졌다. 무언가가 떠난 자리에 시선을 두고서, 한참동안 기억을 추억하다 보면, 무슨 순서라도 있는 것인지, 처음에는 서글픔이, 다음에는 그리움이,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른 무언가로 다시 채워지곤 한다.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게 되는 이 단순한 진실을 유감스럽게도 사십 대가 되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는 것만 같은 사십 대의 근거없는 착각 속에서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리를 망각한 채,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정원으로 돌아와 망치와 삽을 집어든다. 혹독한 북서풍이 몰아치기 전에 정원의 경계를 다듬어야 한다. 네모 반듯한 정사각형의 정원은 경계를 따라 산조팝나무와 고광나무가 늘어서 있다. 하얀 쌀밥을 가득 뿌려놓은 듯한 산조팝나무는 매년 오월이 되면 정원의 경계를 하얀 분필로 색칠한다. 고광나무도 덩달아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흉내낼 수 없는 순백의 꽃을 피워낸다. 고광나무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나의 고광나무는 하얀 종을 닮았다 해서 '스노우벨'이라 불리는 아이들이다. 안타깝게도 아름답고 희소한 흔적을 지우며 조팝나무와 고광나무는 조금은 서글프지만, 고결한 모습으로 잎사귀를 하나, 둘 떨구고 있다. 낮아진 조도를 따라, 잎새들은 그만큼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나에게 어떤 약속을 하는 것만 같다. 비록 지금은 떠나야하지만, 다가올 봄에 우리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것만 같은 묵직한 언어를 소곤거린다.
곧 그들이 탑승한 겨울 열차는 출발할 것이고, 상실이라 착각한 깊이만큼 견뎌야만 하는 계절을 나는 지나야 한다.
겨울 열차는 논두렁을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다. 객실마다 소란스러우며, 그 어느때보다 분주하다. 지금 하지 않은 일들은 이듬해 삼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십일 월에 출발한 열차는 사실, 삼 월에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주홍빛 알전구를 밝힌 열차는 낙엽과 눈물을 뒤로 흩뿌리면서 쉬지않고 달린다. 가을은 바스러지는 낙엽의 계절이다. 그래. 반드시 떨어져야만 하는 계절. 그건 사실 새 삶을 피워내기 위해 스스로를 바스러뜨리는 각오같은 것이다. 잎이 마르고 낙하하는 것은 온도와 일조량이 낮아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봄을 기다리기 위해 새로운 생명이 잉태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뿌리를 캐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 심기 위해 흙을 조심스레 파보면, 가을에 심은 구근들과 여러해살이 식물들은 이미 땅을 향해 자신만의 자리를 만드느라 말을 붙여볼 시간조차없다. 그들은 흙 속에서 금과 틈을 만들며 호흡한다. 나무들은 잎을 떨군 자리에 새 잎이 피어날 낯설기만한 옹이를 만든다. 쌀 한 톨만큼의 크기도 안되는 자그마한 싹 눈에서 봄의 축제는 시작될 것이다. 이곳에서 봄꽃들은 폭죽처럼 터질 것이고, 생을 찬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둔하게도 다시 가을이 되면, 상실했다는 착각 속에서 서러워지고야 말 것이다. 정원에 봄이 가득하기 위해서는 가을에 잃어야만 하는 이 자명한 법칙을 사십 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발아의 계절은 봄이 아닌 가을이라는 생각. 나는 가을을 시작의 계절이라 여기며, 퍼스트 글로리(First Glory)라 부르기도 한다.
정원 한쪽 귀퉁이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자란다. 아카시아 나무는 내가 시간과 노동을 들여 심지 않았으며, 원래 그곳에는 고광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흙이 제 몸에 맞지 않아서였는지, 물이 좋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정원가가 게을러서였는지, 심은지 얼마되지도 않아 죽어버렸다. 정원가에게 이러한 작별은 심각한 사건이었고, 마음이 퉁퉁 붓는 것만 같은 사고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자리에 가느다란 가지가 하나 솟아올랐는데, 그것의 정체는 결국 아카시아 나무로 밝혀졌다. 지금도 오월이면, 포도송이를 멍울멍울 매단 듯한 아카시아가 멀리서 근사하고, 향기는 가까이에서 황홀하다. 살다보면 애써도 이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애쓰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이 있다. 삶의 장난인지, 무게인지 모를 인연과 상실을 미루기 위한 헛된 말들 사이에서 시도때도 없이 어딘가에 머리를 들이박고 추락해야만 하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특히나 사십 대에 이런 일들이 많아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몸도, 마음도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약해지고 좁아졌으나,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석하고 설명을 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는 세월이 흐를수록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다만,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숱한 설명들과 허언들이 웅성거리기도 했으나, 버릴 것 없는 추억들이 그 사이에서 빛나기도 했기에 고요히 서랍을 열어 간직해야 한다는 막연한 확신 같은 것이 들곤한다. 더 이상 덜어낼 말도, 덧붙일 말도 없는 기억들이 고요히 피를 흘리며 내 안에 속삭이듯 살아가게 그냥 내버려둔다.
이미 말들은 시효가 지났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남겨두고, 나아가야하는 것이 삶이다.
마지막 남은 한송이의 백일홍마저 낙화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심었던 라일락도 이번 여름을 지나고서 끝내 죽어버렸다. 무릎이 푹푹 꺾이는 것만 같다. 라일락은 그 동안 단 한번 보랏빛 꽃을 피워냈는데, 아마도 그 시절에 필요했던, 딱 그만큼의 광휘였을 것이다. 죽은 라일락을 들어내는데 손과 발이 시리다. 아득하게 번져가는 그 때의 마음이 바람을 타고 목덜미를 차갑게 지나간다. 사라지는 일보다, 그걸 지켜보는 일이 어려운 계절이 가을인 듯하다.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도달했다 여겨온 것은 부재하고, 스스로를 향한 확신조차 흐릿해지는 것이 가을인 것만 같다. 상실과 부재에 기쁜 일은 기쁘지가 않고, 슬픈 일은 슬프지가 않아서 그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허무의 공간. 방향 감각은 망실되고, 목적성도 분실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의 시간. 사십 대가 되어서 밀려오는 경악스러운 상실감과 허무함의 기분들에서 나는 자유로워지길 원한다. 달리는 겨울 열차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라졌으나, 다시 채워질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하얗고 연약한 뿌리와 연한 싹눈 속에 자리한다. 곁에 있는 이들이 나의 미래며, 봄이다.
어리숙한 사십 대인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정원일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은 땅 속에 숨어 있기에 새싹을 보지 못하듯,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다가올 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십 대의 집착은 사라져버린 과거의 흔적에서 쇠락의 냄새를 쫓곤한다. 곧잘 그 냄새는 증오와 후회, 낙담의 형체가 되곤 하는데, 이건 죽은 라일락을 그대로 두는 어리석음과도 같다. 낙담을 키우고, 후회를 이용하고, 증오만이 동력이 된다는 믿음 안에서 스스로 고양되지만, 한 자리에서 반복될 뿐이다. 죽은 라일락에서는 봄이 찾아와도 보랏빛이 일어설 수는 없는 거니까. 라일락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심은 백합 구근에서 움트는 하얗고 통통한 새싹에서 봄을 발견한다. 그건 현재의 가을이자, 미래의 봄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은밀하게 싹을 틔워낼까. 이 추운 날씨에도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싹눈을 품어낼까. 생각지도 않은 식물들이 얼마나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를까. 나는 알게 모르게 고대하며, 이것에 고양된다.
다가오는 봄에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 무얼해야 하는 지는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스쳐가는 시간들과 텅 빈 공간들에 그저 넋놓고 있지 않는다. 그 시간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온힘을 다해 부딪친다. 공허의 공간에 더 이상 감금되지 않도록 금과 틈을 만들어내고, 나의 영혼과 육신을 그 사이로 욱여넣는다. 언젠가는 구깃해진 나를 돌아보며 안도할 것이다. 마음을 다하지 못한 후회는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쓸모가 없는 거니까. 한 시절의 슬픔과 의지를 담아 최대치를 살아내던 구겨진 나만이 그곳에서 미소지을 수 있을 뿐이다. 좀 구겨지면 뭐 어떤가.
새 생명은 구겨진 흙더미 속에서 싹을 틔우는데.
내 안에 새로운 씨앗을 잉태할 자리를 마련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는 나만의 비밀스럽고도 분주한 새싹과 뿌리를 기대해 본다.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관계의 의존보다는 스스로의 충만을 데려온다. 사라진 것들로 인한 멜랑콜리와 삶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지를 정원은 알려준다. 나는 말하고 싶다. 정원을 가져보라. 아니 정원이 아니어도 괜찮다. 당장 비어있는 화분들을 모아 흙을 채우고 씨앗을 뿌려보라. 그러면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올 것이며, 기다리는 기쁨때문에 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지극한 봄은 벌써 시작되었다.
덧. 온도는 낮아지지만 자신의 맡은 몫을 해내는 식물들이 기특합니다.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 잘 챙기셔요.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