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원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다가오고.

by 시골서재 강현욱


세월은 겸허히 받아들이나, 낡음은 경계한다.

바닥까지 늘어진 회색빛 커튼이 가볍게 햇살을 뱉으며 너울거린다. 미세하게 열린 창을 몰래 넘은 투명한 바람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햇살과 바람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두어 번 팔을 가볍게 들었다, 놓는다. 이건 나이가 들면서 생긴 버릇이다. 이불을 젖히고 상체를 가뿐히 일으킨다. 거울을 보며 잠 묻은 눈에 끼어있는 눈꼽을 살핀다. 나이가 들수록 눈꼽이 자주 고이는 듯해서 신경을 쓰곤한다. 달력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오늘이 입동(立冬)이구나.

이제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정원가도, 정원도, 그렇다고 겨울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죽었다는 표현도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이어지는 것뿐이니까. 가을의 끝에서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한다. 따뜻한 커피, 귀여운 양말, 주홍빛 전구알, 다정한 목소리, 수줍은 볼우물, 평상 위의 양초. 그리고 흙 구덩이에 엉겨있는 꿈꾸는 새싹들...

이런 어여쁜 단어들의 파도에 한참이나 빠져있고도 싶으나, 사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겨울을 앞둔 정원가는 분주하기만 한 나날이다. 오늘은 바삭한 늦가을 햇살 아래에서, 겨울을 생각하며 흙을 뒤엎을 계획이다. 장갑을 고쳐 끼고, 우선 쇠스랑을 붙잡는다. 쇠스랑은 정원가에게 있어 둘도 없는 친구이며, 쇠스랑이 없는 정원가는 상상할 수 없다. 계절이 만들어 놓은 여기저기 널부러진 잡초들과 굴러가는 낙엽들을 쇠스랑으로 긁어 모은다. 군집한 잡초들의 주검들로 나무들의 밑동에 도톰한 봉분을 쌓는다. 겨울 한파를 견뎌낼 온기와 양분이 나무들을 감싸 안을 것이다. 쇠스랑을 내려두고 그 옆에 비스듬히 서 있는 삽을 잡는다. 땅을 향해 시선을 두고서 삽과 함께 이리저리 다니는데, 금이 간 흙들을 발견한다. 삽등을 발로 꾹꾹 눌러 삽 한가득 흙을 퍼 올린다.번의 엇비슷한 동작을 하고서 허리를 펴면, 약간의 통증이 밀려온다. 쪼그리고 앉아 모종을 심다가 일어서면, 시야가 잠시 흐릿해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여전히, 아니 언제까지나 익숙해지지 않을 통증과 현상들. 이럴 때면 세월이 나의 코 앞까지 불쑥 도달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는 늙어가는 중이다.

이만하면 되었을까. 파헤쳐진 구덩이에 낙엽들을 쏟아 넣고, 다시 흙을 부어 섞는다. 물기가 사라지면 돌처럼 딱딱해지는 흙에 주로 이런 작업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빗물과 햇빛에 낙엽들은 가루가 되겠지만, 가루들이 흙 알갱이 사이사이를 덧대어 흙은 고슬고슬해질 것이다. 얼마되지도 않는 정원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흙은 각양각색이다. 흙도 세월이 흐를수록 늙어가니까. 비옥한 흙, 질척거리는 흙, 돌처럼 굳어버린 흙. 정원가는 삽을 들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시 이곳으로 오가며 끊임없이 이런 흙들을 다듬고 반죽한다. 나무와 꽃들이 잘 자라는 흙은 폭신폭신하게 부서져 내리는 카스테라를 닮은 어두운 갈색빛이다. 비옥했던 흙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분도 예전같지 못하고, 배수도 쉽지 않아 물이 고이고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정원가는 비옥한 흙을 만들기 위해 흙을 뒤엎거나 새 흙을 섞어가며 가을을 지나간다. 비록 세월은 흐르지만, 잠들어 있는 깊은 흙의 풍미를 외면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피하지방층은 얇아지겠지만, 깊숙한 곳에서 흙은 두터워진다.

깊은 곳에서 퍼올린 흙은 부드러우며, 촉촉하고, 작은 곤충들이 숨어지내는 살아 숨쉬는 흙이다. 이런 흙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좋은 기분이 되어 흥분하곤 한다. 이곳에 무엇을 심을까. 꽃이 좋을까. 채소를 길러볼까. 아니야. 석류나무도 괜찮겠어. 턱을 조금 들어올리고, 가늘어진 눈매로 조금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이 되곤 하는데, 이런 표정이 사뭇 만족스럽다. 훗날을 기다리는 일이 어쩌면 시간과는 상관없는 공간의 일이라는 생각. 사람도 좋은 흙을 닮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믿음같은 것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표면은 거칠고 딱딱하고 마르나, 자신과는 다른 생각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온전히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하루를 소중히 다루는 마음. 이런 것들이 낙엽가루가 되어 인생의 후반부를 고슬고슬하게 그려내지 않을까.

나 또한 어느새 사십 대의 중반에 서 있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에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기에 무언가를 두고 나온 사람처럼 자주 뒤돌아 보곤한다. 마냥 아름다웠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저 덮어두고만 싶은 세월은 아닌데, 왜 나는 자신이 없는 걸까. 나 지끔까지 무얼하며 살았나. 나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건가. 이런 의문들이 생길때면 괜히 서러워져서 종이 위에 무언가를 눌러 적곤 한다. 빛이 바랜 종이에는 손에 쓸려 번진 잉크 자국이 남는다. 활자화된 삶의 흔적들이 희미하게 번진 듯해서, 때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달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단 한번 밖에는 없는 나의 생이니까. 뒤돌아 다시 데려올 수 없는 시간이니까. 문장들 안에 내가 있고, 남겨진 나날이 있으며, 그게 나의 삶이 된다. 세상의 모든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어째서 잃어버리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걸까. 잃고 앓아야 이해하게 되는 것들. 그 시절의 나이에는 알기에 어려웠을 마음들. 이런 막연한 생각들과 후회들이 문장 안에 섞여 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서는 안되기에 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문장들을 이으며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총명함은 까다로움이 되어가고, 정의로움은 울분으로 얼룩지며, 고독은 외로움에 짓눌리고, 판단력은 고집과 아집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말라서 금이 간 흙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경계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다.

쓸데없이 비대해지기만 한 경험들은 삶을 옭아매지만, 나를 붙잡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종묘사에서 날라온 거름을 갈아 엎은 흙에 뿌려준다. 냄새가 나지 않는 거름이라며 광고를 하지만, 거름은 어쩔 수 없는 거름이다. 후터분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그 냄새가 좋아서 코를 킁킁거린다. 말초신경까지 번져가는 이 냄새를 흙에 넣어 도닥인다. 내년 봄에는 푹익은 흙에서 솟아오른 튤립이 가득한 화단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 번 다 심지 못한 튤립 구근을 한 알 한 알, 신중하게 파종한다.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 비록 청춘의 그 시간처럼 화려한 장밋빛일 순 없겠지만, 튤립들이 피어난 소박하지만 다정한 나날이었으면 좋겠다. 이불 속에서 훌쩍일만 한 어떤 애절한 사연들을 만들기보다는, 지극한 고요 속에서 배움과 깨달음으로 조금은 바쁜 나날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직장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도 깨어있고 배움에 열정적인 분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젊든, 나이가 많든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나,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업무에 있어서나 어떤 광채가 흐르는 것만 같다.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건 흙을 뒤엎거나, 거름을 넣는 것처럼, 스스로를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열정이 식어감을 당연히 여기지도, 체력이 줄어드는 일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도, 엄청난 자만에 빠져 타인의 생각에 벽을 세우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깨를 펴고서, 당당하고 멋있게 늙어가면서 나아간다. 그들은 늙어가지만 낡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고, 그들의 겨울이 결코 차갑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곤 한다. 하지만 그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면, 겨울의 새벽바람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서늘해지고야 만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메마른 정서와 사라진 공감, 문화적 동면, 밑없는 자만과 굳어있는 표정 같은 것들이다. 한껏 경험에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경험에 갇혀버린 사람들. 뒤엎지 않은 흙을 닮은 사람들. 이런 토양에서는 비록 다가온 봄일지라도 튤립은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딱딱한 흙에서 자랄 수 있는 것들은 기껏해야 쇠비름이나 바랭이 같은 잡초들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익숙하지 않은 신체적 통증들을 외면해서는 안되겠지만, 더욱 중요한 건, 심리적인 정체를 못 본 척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나의 나약함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할 때면, 나는 팔을 걷어부치고 정원일을 시작한다. 나를 바꾸는 일이니까.

명상에 잠기고 상상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정원일만큼 좋은 것을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한다.

논두렁의 갈대가 낭창하게 흔들리고, 먼 산의 주홍빛이 연하다. 가을에 서서 정원의 봄을 떠올린다. 내년에는 어느 화단에 백일홍을 심어야 할지 궁리해 보기도 하고, 돌 무더기로 정원을 어떻게 장식할지를 상상하기도 하며, 수련 같은 수초식물을 어디에 가꿔볼까 하는 목가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정원은 언제나 완성되지 못하기에 살아가는 일과 꼭 닮은 듯하다. 건너편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사과나무를 몇 뿌리 뽑아서 가져가 키워보라고 권하기도 하시는데, 사과나무는 나처럼 초보 정원가에겐 아직까지 두려운 존재다. 벌레들도 달려들고, 병충해도 꽤나 많은 나무가 사과나무다. 스피노자는 지구가 멸망해도 왜 하필이면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말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금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나를 가꾸어야 하는 게 나를 위한 행위이기도, 타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십 대는 한마디로 인생의 가을이라고 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지나간 봄과 여름을 추억하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과도 같은 나이가 사십 대인 듯하다. 아쉽거나 후회스럽지 않은 인생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경험과 추억들에 스스로 변하려는 의지가 불꽃처럼 튄다면, 비옥한 흙이 되어 꽃이 되었든, 사과나무가 되었든, 죽음 앞에서도 떳떳한 삶이 피어나지 않을까. 뜨거운 여름이 아니라 차가운 겨울에만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산 너머의 주홍빛 석양을 바라본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 겨울에도 새로워질 수 있다. 타인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만은 낡아지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매 순간이 소중한 이유다. 심지어 겨울마저도.

다가올 겨울을 조용히 기다린다.

수선화 구근

덧. 비가 내립니다. 날이 차갑습니다. 건강 잘 챙기셔요.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사십 대 정원가의 의식의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