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원의 경계는 산이라 하기에는 수줍은 나즈막한 언덕이 접해 있다. 멀리서 다정하고, 가까이에서 든든하다. 가끔 그 언덕에 숨어있던 고라니나, 들고양이들이 정원까지 내려오곤 해서, 소란스러워 지기도 한다. 언덕에는 키 큰 관목과 키 작은 잡목들이 각자의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는데, 가을에는 꽤나 볼만한 풍경을 만들어 내곤 한다. 땅에서는 바람이 잎사귀를 부어대고, 하늘에서는 햇살이 그 위를 덮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크든, 작든 수많은 나무들은 남하하는 햇살을 잠식하기에 나의 정원에 깊고도 긴, 숲 그늘을 드리운다. 그늘이 각인된 이곳에는 주로 환삼덩굴이나, 갈퀴덩굴 같은 강인한 잡초들이 자라곤 하는데, 매년 이맘때면, 얼룩처럼 아쉬움이 묻어있곤 한다. 정원가로서 온전히 몸과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는 후회 섞인 미안함. 여지없이 이번 가을에도 같은 모양의 마음을 하고, 텅 빈 뜨락을 서성이다, 쪼그려 앉기를 반복한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는가. 그늘 또는 반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음지식물은 어떨까. 사라지는 것들은 쓰라리니, 여러해살이면 좋을텐데. 꽃이 예쁘면, 아마도 더 기쁠 것이다. 노트북을 열어 음지식물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붉은 열매에 시선을 빼앗긴다. 꽃이라 불러줘야 할 것만 같은 고혹적인 인삼의 붉은 열매. 정원가만이 가질 수 있는 흥분감으로 살며시 몸과 마음은 고양된다. 인삼 씨앗을 주문했고, 인삼 씨앗이 도착했다. 평상에 앉아 진지한 정원가의 자세가 되어 배송된 상자 안에 놓여있는 재배 설명서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매번 식물들이 배송되면 한결같은 표정이 되곤 하는데, 그건 나의 정원에서 나와 함께 살아갈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럴때마다 그들을 알고 싶은 호기심과 가꾸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얼굴이 되곤 한다. 묵묵하게 각자의 사명을 다하는 그들의 삶이 나에겐 특별하다. 그늘에서 자라는 인삼이라서, 담장 아래에서 소복하게 일어서는 머위라서, 잠자듯 피어나는 달맞이 꽃이라서. 그들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존재를 내려놓지 않는다.
고유한 그들은, 스스로 특별하다.
지금 나는 늦가을에만 볼 수 있는 석양 아래 홀로 서 있다. 연한 빛이 고요하게 산허리를 감싼다. 뼈속까지 파고드는 충만함과 시간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 자그마한 인삼 씨앗을 뿌리고, 평상에 앉아 다가올 봄을 상상한다. 어쩌면 정원가들은 그것만을 생각한다. 싹이 움트고, 잘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 그들 스스로 성장해 있을 정원의 미래. 정원가는 미래를 그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내년에는 그늘진 이곳의 조도를 좀 더 유심히 관찰하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태양의 자전이 나의 짐작보다 훨씬 강렬하다면, 인삼이 자라는 이곳에 차양막을 설치하며, 온 몸을 땀으로 적셔야 할 것이다. 인삼이 잘 자라도록 무거운 비료와 거름을 기어이 이고와서는 흐뭇하게 흩뿌릴 것이다. 내가 해야할 일은 사실 그것뿐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어설픈 동작 안에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다. 사십 대인 나에게 꽃과 열매와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허락되어질까. 벚나무와 목련과 자작나무의 오십 년이 지난 모습을 지금처럼 평온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 이런 감상에 젖어있다 보면, 타인과 비교하고 의존하는 일에 목말라하며 시간을 희뿌옇게 연소시켰던 지난 날의 나의 의지가 기이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지나온 시절의 대부분을 그런 기이한 모습으로 서글프게 소비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곤 한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홀로 선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한다는 생각.
지나온 시간에 깨닫고, 다가올 시간에 성장한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어떤 집단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특별함을 찾아 헤매곤 했다. 지금처럼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색에 잠기는 나는 그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의 효용과는 무관한 모임에 참여하며, 인간관계를 넓힌다는 구호같은 말들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텅 빈 말들과 헛된 말들은 스스로가 즐거운 듯 무성했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갇히고야 말았다. 조직에서의 평판과 지위에 매몰된 채, 그것들이 나를 선명하게 한다는 착각들을 내 멋대로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매몰된 채, 햇빛의 다정함을 알지 못했다. 나의 특별함은 관계와 조직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과 확신이 나를 어리석게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사람이 자산이라는 알맹이 없는 수사에 이끌려 수많은 낮과 밤을 불태웠으나, 남은 건 기억조차 없는 잿빛 잔해뿐이다. 특별하지 않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사십 대가 지나고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만 같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낯설었던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이 특별하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시간과 경험으로 인해 더이상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기에 지나온 흔적은 기억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남은 기억들이 없으니, 재촉하듯 무심한 시간만이 날카롭게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잡을 수 없는 시간은 내버려두고, 사람이 자산이라는 말에 더욱 현혹되는 것인지도. 사실 자산은 자본과 부채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은 스스로 특별해서 혼자인 시간도 잘 보낼 수 있는 자신의 가치. 그래서 타인을 만날 때도 선택해서 만나며, 그 안에서도 당당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부채는 외형적인 자산을 증식시키고자, 자신을 낮추거나 기만하며, 인간관계에 연연할 때 발생한다. 타인에게서 빌려 온 불필요한 관계들과 감정들은 일시적인 충만함과 특별함을 채무자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부채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반드시 이자비용을 발생시키는데, 시간의 허비, 몸과 마음의 소진 뿐만 아니라, 허무와 배신, 집착과 슬픔 따위의 고통들을 채무자는 납부해야 할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때때로 순간의 쾌락에 이끌린 위험한 관계는 뉴스의 지면을 장식하듯, 상상할 수도 없는 이자비용을 채무자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 이자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데, 시간에 비례한 신체와 마음의 쇠락이다. 이자비용 조차 감담하기 어려운 노년이 찾아오면, 부채에 의존했던 자산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필연적으로 혼자의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노년의 세월은 이자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원금을 환수받기 위해 독촉장을 발송할 것이다.
사십 대의 시절은 스스로 충만할 수 있는 준비를 위한 시간이다. 독촉장을 기다리며 살기에는 삶은 너무나 소중하다.
벚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매화나무, 산수유, 살구나무, 배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다래나무, 고광나무, 조팝나무, 아카시아, 자작나무, 목련, 능소화. 나의 정원에서 자라는 수많은 나무들을 둘러본다. 겨울은 비로소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을 정원가에게 허락한다. 조금은 느긋한 보폭으로 나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나무를 휘어 감은 채, 말라버린 덩굴들을 떼어낸다. 무엇이 잡초인지, 나뭇잎인지 이제서야 육안으로 선명하다. 어쩌자고 이런 모습으로 모여서 움싯거리고 있었을까. 덩굴에 휘어감긴 나무들은 키도, 굵기도 지난 해에 비해 자라질 못한 듯하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잡초들은 얽매였으나, 나무를 붙잡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무가 겨울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잡초들은 알게 모르게 소진시켰고, 잡초는 겨울이 되어 책임감 없이 사라졌다. 덩굴의 잔해를 깨끗하게 걷어내니, 나무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뻗은 앙상한 우듬지와 꼭 매달린 잎파리 몇 장이 전부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동안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무들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분주하게 물을 끌어올릴 것이고, 팔을 뻗어 내가 뿌려준 거름을 야무지게 빨아 먹을 것이다. 인간도 이와 같아서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파스칼'이 말한 근원적 비참함은 이곳에서 비롯된다. 불필요한 관계 속에서 재미를 찾고,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한다 여기지만, 그것이 없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을 인간은 견디지 못한다. 사십 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끊임없이 이런 관계를 재생시키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무를 옭아맨 잡초들이 떠오르곤 한다. 잡초가 얽매어도 생이 가장 왕성한 여름에는 견딜 수 있으나, 겨울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남게 된다. 나의 라일락처럼 심지어 연약한 나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고사하기도 한다. 수많은 인간의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걸 몰랐던 자와 아는 자로 겨울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요즘은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올 때면, 그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웅성이는 지를 살피곤 하는데, 행복과 불행의 무게추가 웅성임을 따라 저울질한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정원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나로서는 굳이 관계에 연연하지 않기에 저울의 눈금을 따라 관계를 선택하곤 한다.
혼자서도 평온할 때, 사십 대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 혼자일 때, 마냥 평온한 것만은 아니다. 간간이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아무나 만나고 싶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곤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외로움에 승리하고, 나의 존재에 대한 특별함을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일이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나무를 가꾸는 일이다. 특히나 몸은 마음보다 정직하고, 물성이 있어서 노동을 하다보면, 사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피곤함을 동반한 충만함이 채워지곤 한다. 이걸 알기까지 나는 봄과 여름을 보내왔던 것이다. 앎에 대한 댓가치고는 꽤나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젊은 계절의 나는 타인의 말과 생각에 의존하다보니, 의미도 없는 엄청난 자만과 허영에 허우적이며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나를 지우고 타인을 과하게 의식하는 동안, 체내에 축적된 것은 불안과 허무함 같은 독소 가득한 찌꺼기가 전부였다. 내가 본 나의 미래에 나는 없었으니까. 나의 삶에 대해 나는 스스로 방관자에 불과했으니까.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이들에게만 할애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삶이라는 생각. 내 삶의 주재자는 나이며, 내 영혼의 주인 또한 나라는 믿음. 이런 단순한 사실들은 신의 장난인지, 왜 항상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수많은 실수와 후회, 깨달음이 뒤섞여 퇴적되어 있지만,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나는 나를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사십 대가 되어서 혼자일 때 무엇을 하면 평온한지 선택하고 연습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평온함 속에서 나에게 유예된 오십여 년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한다. 잡초는 아무리 모여도 잡초일 뿐이다. 잡초의 노예가 아닌 온전한 겨울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충만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특별함과 가능성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무리 속에서 굳이 특별하고 싶은가.
아니,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 특별하다. 다가오는 봄엔 라일락을 다시 심어야겠다.
덧. 나무들이 앙상하지만, 이번 겨울도 꿋꿋하게 잘 지내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러하길 바라봅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