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서재로 달린다. 집에서 차로 달려 사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나의 정원을 향할 때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되곤 한다. 하지만 옷을 벗어버린 나무들의 듬성한 우듬지 때문이었을까. 눈에 띄게 줄어든 차량들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유난히도 마음이 시리다. 거리는 사람이 드문하고, 소란스러움은 가만하다. 어느새 소설이 지났다. 열감은 사라지고, 세상은 고요하다. 숱하게 웅성이던 다짐들을 뒤로 하고, 어느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시 돌아온 겨울 앞에서 시간의 무참함을 생각한다. 무참한 시간 앞에서 마음이 목련화처럼 툭하고 꺾인다. 시간의 영원성과 우주의 무한성 앞에서 티끌도 되지 않는 나의 삶은 냉정한 겨울 속에 서 있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스치는 벌거벗은 듯한 서늘함. 계절은 정원가가 옷을 입든, 입지 않았든 도무지 관심이 없다. 겨울은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일어선다. 모든 걸 털어버린 듯한 자의 몸짓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간다. 겨울은 원하는 바가 없기에 구속됨이 없고, 속박됨이 없기에 헐겁다. 그러나 헐거운 만큼 고요하고, 고요함은 단단하다.
나이가 들수록 겨울처럼 가볍고 단단해져야 하는데, 여전히 나의 욕망들은 수시로 고개를 치켜든다.
'나, 다녀왔어.'
시골의 정원에 도착하면 말하게 된다. 쇠스랑을 잡고 떨어진 낙엽들을 긁어 모으며, 고요한 세계로 들어간다. 목련의 반질하고 육중한 잎이 떨어지는 소리와 철없는 새들의 장난질을 따라가며, 정원을 덮을 비닐을 펼친다. 딸기 밭에도, 도라지와 더덕이 자라는 뜨락에도, 시금치와 봄동, 그리고 마늘이 자그마하게 몸을 일으키는 앞뜰에도, 차가운 북서풍이 몰아치기 전에 보온을 위해 비닐을 씌워준다. 겨울의 옅은 낮과 깊은 밤이 번갈아 호흡을 내쉬면, 땅 속의 습들은 얼게 되고, 비록 다년생 식물이라 하더라도 간혹 영하의 온도에서 고사하기도 하니까. 한 때는 무성한 잎들이 숨쉴 틈 없이 서로의 자리를 탐냈으나, 지금은 서로의 흔적이 아쉽기만 하다. 거름을 흩뿌리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두면,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푹푹하게 익어 땅 속 깊이 스며들 것이다. 매년 겨울이 다가오면 정원가가 해야하는 흙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쓰러지고 빛바랜 코스모스들을 뽑아 짚이불을 만들어 나무 아래에 쌓으며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고유한 시기가 있다는 생각. 마흔이 넘은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얼하고 있는 걸까. 어떤 표정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나, 무슨 일이든 기꺼웠던, 욕망에 가까운 열정은 오래된 그날부터 더이상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 정원일과 글쓰기, 그리고 독서가 내게 남은 욕망이자, 열정이라 할 수 있을지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일들이 외로운 노동이라는 점이다. 내가 나에게 욕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간간이 나의 정원에 찾아와 정원일을 돕거나, 장작불을 피우며 사는 일에 대한 수고로움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들과 알고 지낸 세월때문인지 특별할 것 없는 대화와 표정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사이와 틈새를 잇는다. 변화가 없고,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지금의 세월이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가끔은 젊은 날에 타오르던 열정이나, 스스로가 고양시킨 의지같은 것들이 그립기도 하다. 열정이 타오르던 여름에는 닥치는 대로 의욕했으며, 설레었고 언제 어디서든 욕망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하얀 도라지꽃의 영광과 종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더덕꽃의 감미로움이 사무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절은 이미 끝났다. 미친 것처럼, 다시 싹을 틔우던 봉선화도 결국 잠잠해졌다. 봉선화의 쓸데없는 열정에서 고개를 돌리고,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몽실한 흰 구름을 가만히 쫓아간다.
뜨거움은 사라졌으나, 고요함은 정원에 남았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면, 시골의 겨울은 시간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다.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기 위해 장작불을 피운다. 종이를 조금 욱여넣고, 가을 햇살을 머금은 잘 마른 장작을 하나씩 화로에 넣는다. 춤 추듯 솟아오르는 불길 위에 낡은 냄비를 올려 물을 붓고서 라면을 끓인다. 삐죽히 솟아난 대파를 텃밭에서 잘라와 수증기 속으로 투하한다. 정원가가 가질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비록 열정은 사라졌으나, 별 탈 없는 하루와 미소한 즐거움에 정원가는 충만하다. 한때는 나 또한 열정이 있었기에 이쪽에서 소리가 들리면 이리로 뛰고, 저쪽에서 소리가 나면 저리로 달리곤했다. 하지만 스스로 뛰어다녔다 여긴 일들을 돌이켜보면, 쫓겨다니느라 분주했던 것이고, 직선으로 뛴다고 믿었던 걸음들은, 수도 없이 흔들렸던 자국들로 가득하다. 그건 나를 위한 열정이 아니었으니까. 타인과 외부의 기준에 견인된 것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그 안에서 성취감과 정복감에 때때로 도취되기도 했으며, 쾌락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상의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 준 것 또한 열정이었다. 젊을 때에는 넘어져도 쉽게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탄탄했으나, 마흔을 넘어서며 재생력은 하강하는 중이다. 얇아진 피하지방층의 두께만큼이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가 않는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말아야 하나. 아니, 세월의 길이에 비례해 사색의 넓이는 확장되었다. 산 너머로 숨어드는 해를 보며 감상에 젖고, 면발을 휘젖다가 문장을 짓기도 하는데, 그건 열정을 대신해 정신적인 내면의 세계가 알게 모르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내면의 무게와 밀도가 평온을 지켜준다는 생각. 마치 된장독 위에 올려두던 돌덩이 처럼, 묵직한 사색이 마음이 익을 수 있도록 지긋하게 눌러준다. 욕구를 쫓는 열정은 평온할 수 없고, 사색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흔이 넘어 필요한 건, 마음의 평온이 아닐까. 별 탈 없는 무료한 하루가 사색과 평온을 향한 열정을 유지시켜 준다. 열정이 사라진 것에 대한 막연한 슬픔 따위는 현재의 평온함을 지켜주지 못한다. 이따금 봉선화같이 앉아있는 나를 볼 때면, 그래서 책망하기도 한다.
그토록이나 갈망해오던 자유와 행복을, 마흔에 쓰는 정원에서 라면을 먹으며 발견한다.
서재에 들어와 난로에 불을 지핀다. 양동 주전자에 물을 붓고, 서재의 습도를 조절한다. 주둥이에서 일렬로 늘어서 솟아나는 뽀얀 김이 간지럽다. 나는 혼자 살고 있으며, 정원에서도 대부분 홀로 지낸다. 그렇다보니 자잘한 물건들과 도구들, 그리고 책들과 혼잣말처럼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지나가던 누군가에게는 미친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정원일을 할 때면 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전정 가위, 밤 산책을 나갈 때 들고가는 손전등, 쵸코차를 마실 때 쓰는 철제 찻잔, 서가 위에 놓여있는 장식등, 과일과 채소를 수확할 때 쓰는 갈색 바구니, 녹색 갓을 쓴 책상 전등, 벽에 걸린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 빛바랜 노트와 만년필. 그리고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의 소중한 책들. 이들은 친숙한 표정을 지으며, 언제나 정원과 서재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들의 언어는 단순하고 명료하나, 깊이와 질감은 조도나 습도, 나의 기분과 일정, 읽은 책이나, 쓰던 글에 따라 다채롭다. 그건 그들이 침묵하기 때문인데, 그들의 침묵은 어떤 정답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난 가을에는 여기저기 짚이불을 만들다가 전정 가위를 잃어버렸었는데, 그때의 당혹감과 상실감을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정원가의 평온이 한순간 망실되는 사건이었으니까. 왜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은 충족되었으니까. 그래서 더이상 열정이 솟아나지 않으니까. 내가 그러했듯, 전정 가위를 아무 곳에나 두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귀했던가를 주저앉아 한탄하는 게 사람이다. 열정이 사라졌음을 슬퍼하며 삶의 무의미함을 떠올리기 보다는, 현재의 소중함에 감사할 줄 알 때, 마흔 그 너머의 삶은 비로소 평온할 수 있다는 생각. 오늘은 무엇을 읽다가 잠을 청할까. 서가에 꽂힌 책이 든든하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다정한 밤이다.
겨울은 비로소 정원가에게 정원과 오두막집을 살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노트를 펼치고 모든 감각과 감정을 동원해 현재를 느끼며, 기록한다. 마음으로 느낀 말들만이 나의 노트를 지나갈 수 있다. 서랍 속 노트에는 주로 짧은 단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재를 위해 사진을 남기고, 노트에 기록하곤 한다. 이런 행위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미래의 어느 날,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기습에 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있을 때, 펼쳐보기 위함이다. 특별할 것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상이지만, 스스로 평온하고 충만했음을, 몇 십 년 후의 나에게 전하고 싶고, 나를 돕거나 살리고 싶으니까. 비닐을 깔다가 어린 봄동을 밟아 속상했던 일, 매번 찾아오는 들고양이가 조금씩 나와의 거리를 좁혀와 흐뭇했던 일, 건너편 할아버지가 잘 자란 무를 먹어보라며, 검은 비닐봉투를 한아름 건네던 일. 이런 자잘한 일들 따위를 기록하지만, 정작 나를 돕거나, 살릴 일도 결국 이런 일들일 거라는 믿음이 내 안에 있다. 노트를 끄적이다, 정사각형의 통창 너머를 바라본다. 정원에 밝혀둔 불빛 덕분에 마법에 걸린 듯한 고요한 정원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 은빛으로 물든 정원, 그 너머의 호수에는 낚싯꾼들이 밝혀 놓은 반딧불이를 닮은 불빛들도 보인다. 한낮에는 멀리 누운 산허리와 크고 작은 장난감 같은 집들이 모여있는 풍경도 볼 수 있다. 서재에서 바라보는 풍경들, 나무들과 덤불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달은 내가 앉아있는 서재와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과 함께 내 삶에 깊이 속해 있다. 혼자 산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들과 더불어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지탱해 주고, 믿을 만한 존재들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말들이 우리 사이를 오간다. 열정이 만들어 낸 수많은 좌절과 배신, 실망과 절망 따위의 언어는 만들지 않는다. 지난 수년 동안 모든 낮과 모든 밤에, 모든 계절과 모든 날씨 속에서 말없이 그들은 내 곁에 있었다.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함께 했으며, 서로의 은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비록 재미도 없고, 도파민과는 무관한 이야기들 뿐이지만, 고통이나 슬픔 또한 자리하지 않는다. 그저 소소한 즐거움에 마흔이 넘은 정원가는 황홀할 뿐이다. 다락에 올라가 별이 무수히 빛나는 깨끗한 밤하늘을 가물거리다, 잠을 청한다. 분명 아름다운 나날이다. 무심히 지나쳐도 괜찮은 나날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한다.
이런 고요한 나날들을 정원가는 열망하니까.
덧. 이번 주 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도톰하게 옷 여미시고, 건강한 겨울 보내시길 바랍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