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은 "문명 앞에 숲이 있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는 샤토브리앙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위치한 이 산은 해발 1561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산으로, 조선시대부터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벌목 또한 엄격히 금지되었기에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희귀 식물들이 자생하는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올림픽에서 활강 경기를 치르기 위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스키장을 건설해야 했고,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가리왕산이었다. 문제는 스키장 건설로 인해 가리왕산이 수천 년 지켜온 생태적 가치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인공 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했기에, 이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환경 단체와 전문가들은 가리왕산의 생태적 중요성과 복원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올림픽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스키장이 꼭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시급했다.
결국 올림픽 이후 산림을 복원한다는 조건으로 스키장이 건설되었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스키장에 설치된 곤돌라는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 곤돌라를 이용해 가리왕산 경치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급증했고, 이를 올림픽 유산으로 남겨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곤돌라 운영 유예기간이 작년 12월 말까지였지만, 운행이 6개월 더 연장되었다.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내겐 곤돌라를 이용한 산행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한파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지만 점심이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많이 풀렸다. 바람도 없어서 곤돌라 못 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곤돌라 승차권을 사서 밖으로 나오니, 2018 동계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랑이와 반달가슴곰이 마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곤돌라에 올라타자마자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움직이며 탑승장에서 천천히 멀어진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며 마을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 풍경 뒤로 끝없이 펼쳐진 산줄기가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는 마치 신선이 되어 세상을 뒤로하고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그 시절 선수들을 실어 나르던 곤돌라가 이제 스키어들 대신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쉼 없이 실어 나르고 있다. 산꼭대기까지 걸어서 가려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몇 시간을 낑낑거리며 올라야 하지만, 곤돌라를 타면 단 20분 만에 큰 노력 없이도 오를 수 있다. 요즘처럼 눈이 많은 겨울에는 정상까지 가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이 곤돌라 덕분에 쉽게 정상에 올라볼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장구목이에서 가리왕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설악산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오르는 것과 비슷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도전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이 곤돌라가 없었다면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산임에 틀림없다.
곤돌라 아래로 보이는 슬로프 위에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올림픽 기간 동안 선수들이 은빛 슬로프를 질주하던 화려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지만, 예전의 자연 친화적인 환경으로 조금씩 되돌아가는 모습이 느껴진다.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자연의 본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생채기 났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 같다.
몇 해 전 여름, 장구목이에서 이끼계곡을 지나 가리왕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놀라움과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0도를 훨씬 웃도는 삼복더위에도, 이끼로 뒤덮인 서늘한 계곡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비로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원시림 계곡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그 광경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리왕산의 이끼계곡 원시림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리왕산에 스키장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했을 것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파괴될 위험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리왕산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심각성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다행히도 스키장은 상봉의 이끼계곡 원시림을 조금 비껴 난 하봉에 건설되었다. 원시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동계올림픽 개최를 통해 대한민국 동계스포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세계적으로 우리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이곳에서 열였던 스키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한때 타이거우즈의 여자친구로 알려져 우리 국민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미국의 린지 본 선수가 평창올림픽 홍보대사로 임명되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월드컵에서 통산 81회나 우승했고, 스키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으며 "스키 여제"로 불리고 있었다.
많은 팬들은 그녀가 가리왕산 설원을 가르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아쉽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여느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평창에서 새로 떠오르는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체코의 레데츠카 선수였다. 레데츠카는 스노보드가 주 종목이었지만 활강경기에서 우승을 한 것이었다. 다음날 열린 스노보드 종목에서도 우승하며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한 대회에서 각기 다른 2개 종목에 걸쳐 금메달을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스키 경기가 열렸던 슬로프 위로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며,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사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한다. 곤돌라 문이 열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 온몸으로 느껴지는 산의 생동감,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산꼭대기에 조성된 데크길은 마치 천상의 공원길처럼 꾸며져 있다.
카메라를 든 산객들은 겹겹이 쌓인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과 그 사이를 가득 채운 운무의 신비로운 자태를 담느라 여념이 없다. 그 풍경은 정말 아름답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등산객들의 모습은 이곳에 생동감과 사람 사는 냄새를 더해준다. 이 순간 자연과 사람은 하나가 되어 가리왕산의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모습에서 가리왕산은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문명이 공존하는 장소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산은 우리가 자연을 배려하고 그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