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지산 산행기
민주지산은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맥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추풍령 휴게소 남서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산은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경상북도 김천시의 경계에 있으며, 1000미터가 넘는 고봉을 네 개나 품고 있는 웅장한 산이다.
각호산,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을 종주하면 충청도에서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멋진 등산 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
'민주지산'이라는 이름은 정치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와는 관련이 없다. 산의 형태가 민두룸 하다고 해서 '민두룸산'으로 불렀던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안내산악회 버스가 꾸불꾸불 도마령(刀馬岺)으로 접어든다. 몇 해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쏟아지는 눈 때문에 주변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고갯길을 따라 펼쳐진 산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고개는 '칼을 든 장수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전설 속 장수 대신, 등산객들이 가득 탄 버스가 굽이굽이 오르고 있다.
버스가 정상 주차장에 도착하고 산객들이 하차한다. 차에서 내린 산객들은 바쁘게 등산 채비를 마친 후 급히 산으로 올라간다. 전장에 투입되는 군인들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듯, 오늘 이곳을 찾은 산객들에게도 각자의 목표가 있다. 어떤 이는 민주지산까지, 또 어떤 이는 석기봉을 거쳐 삼도봉까지 가는 것이다. 모두가 본인의 산행 능력에 맞춰 스스로 설정한 목표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인다. 나는 민주지산까지만 가기로 하고, 여유롭게 도마령의 경치를 즐기며 산행을 시작한다.
각호산으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른 언덕길이 계속된다. 해발고도를 약 400미터 올리는 코스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구간이다. 등산스틱과 아이젠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출발을 했지만, 금방 숨이 차고 몸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겉옷을 한 꺼풀 벗고 다시 걷기를 시작하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산 아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몇 해 전 쏟아지는 눈 때문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사람 발자국만 따라서 올랐던 기억에 비하면, 오늘의 산행 조건은 훨씬 좋은 편이다.
쉬었다 걷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땀이 흠뻑 젖을 즈음 첫 조망이 시원하게 열린다. 눈앞에는 민주지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이 펼쳐지고, 저 멀리 덕유산 스키장 슬로프도 보인다. 한 시간 가까이 힘들게 올랐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첫 조망이다. 이 기분은 민주지산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각호산 정상으로 가는 길, 몇 발짝 더 걸으니 금방 도달했다. 각호산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 찍는 산객들이 여럿 보인다. 정상석 뒤로 펼쳐지는 풍경은 조금 전 첫 조망터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멋지게 보인다. 천 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저 멀리까지 차례로 늘어서 있다.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산행 때,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각호산 정상석만이 보였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니다. 같은 산이라도 날씨나 계절에 따라 보여주는 모습과 느껴지는 감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저 멀리 보이는 민주지산까지는 넉넉잡아 두 시간 거리. 시원한 바람과 쌓인 눈을 밟으며 편안하게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저 봉우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능선길은 눈길과 흙길이 적당히 반복된다. 각호산이 1,176미터 민주지산이 1,424미터이니, 3km에 걸친 능선 전체로 보면 약간의 오르막이 계속된다. 한 시간 정도 걸어가니 민주지산 정상이 한결 가까워졌고, 능선길을 따라 걷는 산객들의 숫자도 점점 많아진다. 물 한 모금과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피소 앞에 이른다. 이 대피소는 지난번 산행 때, 추위와 폭설을 피하려고 잠시 들어갔던 곳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밖에서 구경만 한다. 대피소는 허름하지만, 산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장소다. 이곳에 얽힌 사연은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26년 전 4월 1일 5 공수특전여단 부대원들이 이 근처에서 천리행군 5일 차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날의 행군 코스는 민주지산을 통과하는 구간이었다. 산 아래에서 대원들이 출발할 때는 부슬비가 조금씩 오락가락하는 날씨였지만, 훈련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200여 명에 이르는 부대원들은 대열을 이뤄 행군을 시작했다. 천리행군 훈련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 누구도 잠시 후 닥쳐올 엄청난 상황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모두가 오늘 훈련도 무사히 잘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을 했고, 비를 맞은 병사들은 피로가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 지휘관은 이 정도는 날씨는 강인한 특전사 군이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행군을 계속했다.
민주지산으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을 때, 비는 눈으로 변했고 기온은 더 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사들은 4월에 내리는 눈이라며 눈장난을 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눈발은 더 굵어지고, 기온은 체감온도 영하 30도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주변은 어두워지고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체력은 바닥을 찍었고, 방향감각을 상실하며 눈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급기야 행군 대열은 흩어졌고, 눈 속에서 탈진하는 병사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전기 배터리까지 방전되어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대열에서 떨어진 병사들은 눈 속에서 길을 잃고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병사들은 산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체력만 더 떨어질 뿐 민주지산 깊은 숲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저체온증에 걸린 병사들은 눈 속에 주저앉았고, 그들의 눈동자는 점차 흐릿해져 갔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사 정신을 중얼거렸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청춘들은 그렇게 차디찬 눈보라 속에서 꺼져 갔다.
대피소가 그 시절에도 있었다면 그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날의 슬픔은 세월 속에 묻혔고, 대피소 앞에 세운 작은 안내판만이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알리고 있다.
대피소를 뒤로 하고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이제 삼백 미터만 더 가면 민주지산 정상이다. 힘을 내어 마지막 언덕을 오른다. 마침내 도달한 민주지산 정상, 커다란 정상석이 반갑게 맞이한다. 특이하게도 앞뒤가 똑같은 모습이다.
앞 뒤가 똑같은 정상석답게, 조망도 360도로 어느 한쪽도 막힌 곳 없이 사방이 탁 트였다. 몇 해 전 이곳에 올랐을 때, 쏟아지는 눈 때문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 정말 시원하고 좋다. 저 멀리 보이는 삼도봉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다짐한다. 다음에 또 시간을 내서 볼 수 있도록 아껴 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오늘 안 간다고 해서 저 봉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산행은 더 가고 싶을 때 그만둘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안전한 산행의 철학이다. 무리해서 더 가는 것보다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아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며,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산행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석기봉, 삼도봉, 그 모든 봉우리와 백두대간 능선이 바로 앞에 보인다. 언젠가 저곳도 다시 찾아볼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걸은 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던 길이었음을 감사하며, 오늘의 산행은 민주지산에서 마무리한다.
26년 전, 그날의 사고를 떠올리면, 날씨와 주변 상황을 잘 판단하고 그에 맞춰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자연을 대할 때, 우리는 그 크기와 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날의 비극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민주지산을 더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산행도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다. 차가운 바람과 눈을 밟으며 지나온 길, 그 모든 순간들이 내가 걸어온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은 단순히 산을 오르는 길이 아니었다. 삶의 고난과 여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며 걸어온 길이었다.
이제 하산을 시작하며, 오늘 하루의 여유를 만끽할 것이다. 나만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또 다른 산행을 준비할 것이다. 다시 한번, 오늘도 내일도 안전한 산행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