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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Jun 05. 2023

그냥 먹지 마세요, 빵에 양보하세요.

과일을 넣은 빵

 ‘과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용사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상큼하다’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런데 빵에 과일을 넣으면 어떨까? 내가 어릴 적에는(=라떼는) 베이킹에 들어가는 과일은 건포도가 가장 흔했고, 그다음이 케이크 시트 사이에 들어있던 후르츠칵테일이었다. 그러니 ‘과일 들어간 빵’이라고 하면 일단 멈추고 유심히 살펴봐야 했다. 지금이야 휘황찬란한 과일 타르트나 케이크가 많이 나와서, 과일이 들어갔다고 하면 웬만하면 하이패스로 통과지만.


 우리 가족은 과일을 많이 먹는 편이다. 밥을 먹고 나서 꼭 후식으로 과일을 먹다 보니, 과일을 먹지 못한 날에는 입안이 텁텁하고 찜찜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나는 자취하며 혼자 살 때도 과일을 챙겨 먹었다. 소규모로 팔고, 음식물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 귤이나 방울토마토 같은 종류로.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지금은 그런 제한 없이 다양한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스로 산 과일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사과는 달지도 않으면서 푸석하기까지 하면 먹을 때마다 기분이 영 별로다. 그렇게 맛없는 사과가 잔뜩 생겼을 때는 사과파이를 만든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설탕과 레몬즙, 시나몬 가루를 때려 넣고 졸이면 대충은 수습이 된다.


 파이를 만드는 과정은 아주 번거롭다. 파이지와 필링을 만드는 것만 해도 힘든데, 모양을 잡고 성형하는 과정은 정말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든다. 제과기능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가입한 카페에서도 제발 사과파이가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 글이 아주 많았다. (수험생들의 이런 고충을 알아서인지 2023년도에는 사과파이 품목이 사라졌다!) 사과파이는 정말이지, 사과를 깎고 자르고 졸이는 과정만 해도 이미 체력의 절반이 깎인다. 평일에 퇴근하고 사과파이를 만들려면 거의 취침 직전까지 빵을 구워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틀에 걸쳐 만든다. 하루는 필링과 파이지를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다음 날에 파이를 성형해 굽는 식으로. 웬만하면 아예 주말에 날을 잡고 만드는데, 쉬지 않고 작업하다 보면 허리가 아파온다.


여러가지 크기로 만든 사과파이(사유 : 파이틀이 부족했음)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유난히 뇌리에 박힌 장면이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백설 공주가 새들과 함께 파이를 만드는 장면이다. 백설 공주가 파이틀에 맞게 반죽을 잘라내면 새들이 파이 가장자리에 발자국으로 모양을 내는 동화 같은 장면이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그래서인지 파이를 만들 때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설렌다. 필링 위에 반죽을 전체적으로 덮고 가운데만 살짝 구멍을 내도 되지만, 나는 ‘애플파이’하면 딱 떠오르는 바구니 모양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모양으로 만들든 구멍을 뚫어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필링이 끓어 넘칠 수도 있다. 오븐에 넣기 전 예쁘게 만들어 낸 파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풍요로 충만해진다. 이래서 외국영화에서 파티를 할 때마다 파이를 굽는 걸까 싶다.


 만약 집에 파이틀이 없다면 애플 턴오버를 만들면 된다. 애플 턴오버는 쿠키커터로 찍어낸 파이지 사이에 사과 필링을 넣고 만두처럼 반을 접어 굽는데, 굽전에 달걀물을 바른 후 젓가락으로 나뭇잎 잎맥 모양을 그려주면 더 예쁘다. 대부분의 빵이 그렇지만, 파이류는 특히 당일이 가장 바삭해서 맛있고 금방 눅눅해져 버린다. 그러니 식자마자 곧바로 냉동실에 넣어놓았다가 먹고 싶을 때 꺼내서 에어프라이어에 돌려먹는 게 좋다.

만두처럼 접어서 굽는 애플 턴오버


 빵과 잘 어울리는 의외의 과일은 레몬이다. 베이킹이 취미가 되기 전까지 나는 마트에서 레몬을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었다. 횟집에서 비린내 제거용으로 나온 레몬은 혀끝만 살짝 닿아도 pH가 엄청 낮겠구나 싶은 신맛이 났다. 그런데 레몬을 빵에 넣는다니? 레몬뿐 아니라 시트러스 계열(귤속, Citrus : 레몬, 오렌지, 라임, 자몽 등을 포함하는 분류군)의 과일이 가진 상큼하고 시큼하고 신맛이 과연 빵과 어울릴지 의아했다. 그러다 우연히 먹게 된 레몬 마들렌은… 정말 맛있었다! 레몬의 상큼함은 느끼할 수도 있는 버터의 맛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해 7권의 장편 소설을 쓰게 한 마들렌에서도 이렇게 입안 가득 레몬 향이 났을까?


레몬 마들렌(왼쪽)과 레몬 머랭 타르트(오른쪽)

 레몬을 사용하는 베이킹에서 제일 귀찮은 건 레몬 세척이다. 레몬의 향은 즙보다 껍질에서 많이 난다. 노란 껍질 안쪽의 흰색 부분에서는 쓴맛이 나 노란 부분만 살살 긁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든 레몬 제스트는 레몬 하나당 많아야 2g 정도 나온다. 진짜 눈곱만큼이다. 그런데 왁스 코팅 되어있는 레몬 껍질을 그대로 먹을 수는 없으니 공들여 세척을 해야 한다. 베이킹소다로 뽀득뽀득 씻고, 굵은소금으로 문질러 씻고, 끓는 물에 20초 정도 살살 굴려 왁스를 녹여내고 찬물에 헹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레몬 향이 주방 가득 퍼진다. 이제 물기를 제거한 레몬의 노란 껍질로는 레몬 제스트를 만들고, 레몬 과육은 씨를 빼고 즙을 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닌데, 이렇게 갓 만든 레몬 제스트와 레몬즙을 넣어 만든 빵에서는 노동의 가치가 느껴지는 맛이 난다. 그러니 힘들 걸 알아도 또다시 레몬을 벅벅 문질러 씻게 되는 것이다. 레몬 마들렌, 레몬 머랭 타르트, 레몬 커드… 생각만 해도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이제는 TV에서 벌칙으로 레몬을 먹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벌칙으로 레몬 먹을 거면 껍질은 나한테 양보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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