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고맙다는 말에 화가 난 이유
올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여름을 많이 타는 나는 몇 년째 지독한 감기를 여름이 끝날 때까지 달고 살았다. 에어컨을 끄면 덥고, 켜면 계속 기침을 했다. 특히 수면 장애가 있어서 밤에는 에어컨을 켤 수밖에 없는데 마스크를 쓰고 자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달갑지 않은 여름은 점점 빨리 찾아왔다. 5월 중순부터 더워질 조짐이 보이자 바짝 긴장했다. 생전 안 하던 러닝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조금이라도 감기 기운이 있으면 바로 병원에 갔다.
이번 여름만큼은 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미리 전투태세에 돌입할 준비를 했더랬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나보다 상대적으로 여름을 덜 타는 남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기 몇 달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피로가 심하면 코피를 흘리는데 연달아 그러더니 급기야 열이 올랐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 줄 알고 병원에 가 약을 처방받았다. 그래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링거를 맞았다. 그렇게 낫는 줄 알았는데 잠시 소강상태였을 뿐, 한 달 뒤 다시 나빠졌다. 처음에 몸이 좋지 않았을 때 단순 몸살로 치부했 것을 비웃기라도 한 듯 남편의 몸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처음에 열이 올랐을 때는 처방받은 약을 먹고 한숨 자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밤새 끙끙대며 앓던 남편의 상태는 아침이 되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병원 문을 열자마자 서둘러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남편의 체온은 39.5도가 넘었다. 그때까지 집에 체온계가 없어서 그 정도일줄은 몰랐던 우리는 생각보다 심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또 링거를 한 대 맞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열이 내리는 듯하더니 다시 올랐다. 혹시나 하고 상급병원 의뢰서를 받아온 것이 있어서 가까운 상급 병원으로 갔다. 예약을 하고 가지 않았는데 다행히 의뢰서가 있어서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입원 진단이 내려졌다. 그때까지 남편의 상태가 걱정은 되었어도 입원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입원할 준비를 하나도 해 오지 않았다. 39도가 넘는 고열이 지속되어서 각종 검사를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밤에 열이 오르면 바로 대처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입원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내가 보호자가 되어 간병을 한 것도 처음이다. 사십 년 넘게 살면서 그런 경험이 없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남편과 혼인 신고부터 한 이유가 이런 날을 대비해서였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결혼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는 내가 지금의 남편과 혼인신고를 한 이유는 그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는 것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또 이혼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남편과 결혼을 주저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남편과는 처음 맺는 관계이지 않은가. 그와의 관계에 수많은 우여곡절과 괴로움, 후회 등이 남더라도 그 못지않은 기쁨과 행복이 있을 걸 알기에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남편의 보호자이자 간병인이 되고 나니 어쩔 줄을 몰랐다. 전 X의 시어머니와 지금 남편의 시어머니 간병을 해 본 적은 있지만, 모두 낮에 한 것이고 24시간 상주하면서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보호자도 아니기 때문에 부담도 덜했다.
남편이 입원한 사실을 양가에 알리지 않았다. 간병을 교대해 줄 사람도, 병원비를 보태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좋지도 않은 소식을 굳이 알려서 뭐 하나 싶었다. 남편은 내가 이런 일에 서투른 걸 아니까 내가 집에 짐을 챙기러 간 사이 혹시나 하고 가입한 간병보험에서 간병인을 신청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당장 취소하라고 윽박질렀다. 이름 모를 간병인이 내 자리를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간병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런 줄 알고 남편한테 서운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 나는 남편 간병을 시작한 지 이틀도 채 안되어서 결정을 후회하고 말았다. 처음에 들어간 병실이 6인실이었는데 거의 중환자급의 환자가 있었다. 그분은 밤새 가래와 기침을 심하게 하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은 둘째치고 어찌나 소리가 거슬리는지 남편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해열제를 다 맞으면 다시 열이 오르는 남편의 증상 때문에 나는 밤새 뜬 눈으로 지키다시피 했다. 한 술 더 떠서 그 환자의 앓는 소리까지 더해져 신경이 곤두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예민한 성질인 건 맞지만 문제는 나보다 남편이었다. 그 환자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참고 있기엔 남편도 환자가 아닌가.
한 번 병실을 정하면 임의로 바꿀 수 없다는 병원 안내문을 보았지만 밑져야 본전인 심정으로 데스크에 가서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역시나 간호사는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말 끝에 "환자라서 그런 거 아니냐. 당신이 이해해라"는 식으로 말해서 순간 욱했다. 그럼 내 남편은 환자가 아니냐. 남편도 치료받으러 온 거다. 무작정 참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 않으냐고. 이런 꼴 보기 싫으면 1인실 가면 되겠지. 그런 씁쓸한 마음으로 더는 바라지 않고 물러갔다. 괜히 진상으로 찍혀서 남편에게 불이익이라도 갈까 봐 억지로 좋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간호사가 수간호사에게 얘기를 했는지 바로 병실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잘 됐다 싶어서 얼른 짐을 챙겼다. 남편도 못내 힘들었는지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남편은 열이 내리지 않아서 24시간 내내 해열제를 맞았다. 185센티가 넘는 키에 덩치도 건장한 남편은 휠체어에 몸을 욱여넣고 병실을 옮겼다.
다행히 옮긴 병실은 창가 쪽이라 더 넓고 쾌적했다. 6인실인데 절반 이상이 비어 있어서 조용했다. 이제야 좀 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병실 생활이 살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병실에서 편하게 지낼 생각을 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금세 깨달았다.
맞은편에 있던 고참 환자는 연세가 좀 있는 분이었는데 에어컨 빌런이었다. 그때가 7월 중순, 한창 열대야로 시달릴 날씨다. 아무리 몸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바깥 온도가 35도에 육박하는데 에어컨 온도를 28도에 바람 세기도 제일 약하게 하거나 아님 아예 꺼버렸다. 데스크에 있는 에어컨의 리모컨을 가져와 마음대로 조절해 놓고 혼자 어딘가로 가 버렸다.
처음엔 에어컨을 맘대로 조종할 수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삑 삑!'하고 에어컨의 리모컨 누르는 소리가 나길래 커튼을 열고 보니 맞은편 환자분이 맘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나는 또 데스크에 가서 문의했다. 에어컨을 조종하는 건 마음대로 하냐고. 그랬더니 간호사가 병실마다 에어컨 조종은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한마디로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병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갑갑한데 에어컨에서 더운 바람까지 나오니 내가 병날 지경이었다. 남편도 고열에 시달려서 덥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에어컨 빌런이 되기로 했다. 맞은편 환자가 나가면 잽싸게 리모컨을 가져와 냉방으로 바꿨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그분이 왔을 때 여쭤봤다. 에어컨 조절 좀 해도 되겠냐고. 처음엔 떨떠름하게 그러라고 하더니 안면을 트고 난 뒤에는 춥다고 했다. 그분은 암환자였다. 어쩌겠는가. 환자의 말을 들어야지. 천만다행으로 병동마다 휴게실이 있어서 그곳에서 부족한 에어컨을 쑀다.
며칠만 입원하면 될 줄 알았던 남편의 증세는 생각보다 차도가 없었다. 입원 기간이 일주일을 넘어가자 이제는 병원을 탈출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남편이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지는 낮 시간을 이용해 이삼일에 한번 집에 다녀왔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 까봐 오래 자리를 비우지도 못해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 했다.
그때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병간호를 교대해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시어머니도 항암 치료 중인데 남편이 외래 진료 할 때마다 동행을 했다. 이번에는 같이 못 간다고 얘기를 해야 했다. 평소에도 남편은 통화하기 껄끄러워하는데 이번엔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통화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직접 전화를 했다가는 걱정보다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을 게 뻔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편치 않아서 내가 하는 게 나았다.
시어머니는 예상대로 본인 할 말만 길게 늘어놓았다. 같이 병원에 못 가는 건 신경도 쓰지 말라고 했다.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데 좀 심사가 뒤틀렸다. 그렇게 별 일 아닌 일에만 왜 그렇게 꼬박꼬박 남편을 불러댔을까. 남편 사정은 묻지도 않고 본인 진료 날짜만 일방적으로 통보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살을 빼라, 이걸 먹어라, 저걸 해라. 등등 주치의보다 더한 처방을 내렸다. 거기까지는 나도 들을 만했다. 며칠 동안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전전긍긍하다 보니 벽에다가 대고 하소연하고 싶을 때였으니까. 면회를 오겠다는 걸 독감 환자가 많다고 절대 오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통화를 하고 끊으려는데 마지막 시어머니의 말이 걸렸다.
그래, 수고하고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말인가.
마치 사장이 직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네네하고 끊었다. 별 일 아닌 의례적인 말로 넘기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평소 그분의 성향을 아는 나로서는 고맙다는 말이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시어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도 없이 평생 키운 맏아들을 웬 나이 많은 이혼녀에게 뺏긴 것이다. 처음에 혼인신고도 하지 말라고 했던 분이다. 본인도 남편을 낳고 나서 했다며 빨리 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결혼식도 생략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요식행위는 혼인신고 밖에 없는데 상견례나 결혼식부터 하라는 게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나중에 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우리끼리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말했더니 화를 냈다고 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자기는 인정할 수 없다고. 아마 그렇게 말한 것을 시어머니는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소원하던 사이가 시어머니의 암 투병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좀 가까워졌다. 간병인을 쓰지 않겠다고 해서(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분이다) 낮 시간에 간병이 가능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생판 남보다는 탐탁지 않은 며느리가 그나마 나았는지 내가 간병을 할 때 전혀 마다하지 않고 와달라고 하셨다.
혼자 자식을 키운 시어머니의 강인함을 존경한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그분의 의사도 존중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무슨 죄지은 사람 마냥 눈치 보며 억지로 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게 없을 테니까. 착한 며느리 프레임은 첫 결혼의 실패와 함께 벗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것은 나를 병들게 할 뿐이라는 걸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나서 알았다.
그래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원래부터 살가운 성격이 아닌 데다가 억지로 가까워지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았다. 각자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드디어 남편이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주치의는 며칠 더 있기를 바라는 듯 쉽사리 퇴원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우리는 집이 가까워서 매일 통원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겨우 퇴원허락을 받았다.
퇴원하고 나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 사이 시어머니는 수시로 나에게 연락해서 남편의 상태를 물었고 퇴원하면 연락하라는 당부까지 들었다. 남편도 퇴원 사실을 알리라고 하는데 너무 짜증이 났다. 내가 알아서 연락할 건데 그걸 왜 신경 쓰냐고, 본인 몸이나 신경 쓰라고 쏘아붙였다.
어머니가 고마워하실게 뭐가 있어요?
당연히 남편 간호를 한 것뿐인걸요.
나는 격앙된 감정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또 "수고했고, 고마워!"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립서비스 같은 말이었는데 참다못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워하실게 뭐가 있어요? 당연히 남편 간호를 한 것뿐인걸요."라고 따지듯 말해버렸다. 남편도 시어머니가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고 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왜 어머니가 고마워할 일이냐고 되물었다.
시어머니는 1초간 침묵하더니 "어? 그래."라며 찝찝하게 전화를 끊었다. 자꾸만 본인 식대로 해석하고 말하는 것에 화가 났다. 그런 화법의 최대 피해자가 남편이었고, 그 후유증이 우리 결혼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나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두 사람의 사이를 간과할 수가 없었고,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고마운 말이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고맙다는 말에 담긴 속내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해 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그 말은 곧 남편이 자신의 소유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영원히 자신의 자식이겠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남편일 뿐이다. 남자들은 부모의 자식과 아내의 남편 사이에서 역할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했어도 정서적 독립이 안되어서 결혼 생활 내내 싸우는 부부가 허다하다.
시어머니는 남편 없이 두 아들을 키웠다. 장남인 남편에 대한 애정은 더 각별하다. 아들에게 남편 대리 역할을 바라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제 뜻대로 주무르려고 했다. 만약 남편이 결혼하고도 시어머니와 감정적 분리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주저 없이 또 이혼했을 것이다. 그 부분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이해와 관용이라는 족쇄로 나를 옭아맨 끝에는 우울증 밖에 남는 게 없다는 걸 이미 차고 넘치게 겪었다.
그래서 나는 시어머니의 고맙다는 말을 거부한다.
시어머니의 낮 간병을 도맡았을 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꺼이 기분 좋게 받았다. 나도 시어머니가 참기름 한 병이라도 주면 당연히 고맙다는 말을 한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는 죄송하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내 남편의 간병을 한 일에 대해 시어머니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정 고맙다면 차라리 뭐 필요한 게 없는지, 도와줄 일은 없는지 물어봤더라면 나야말로 기쁜 마음으로 말 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을 것이다.
퇴원 후에도 남편은 안정을 취해야 했다. 여전히 더위는 기승이었고,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집에서 마음껏 에어컨을 틀며 남편이 최대한 쉴 수 있게 배려했다. 남편이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병원에서는 남편이 몸이 아프니까 까칠하게 굴었는데 이제와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방금 전까지 저조한 기분이 남편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스르륵 풀렸다.
진심으로 와닿은 고맙다는 말은 마법 같은 효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