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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 씁쓸한 아몬드 향내같은 짝사랑

[저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by 이그조띠끄 김서윤


읽고, 그 시간을 기록한다


시간을 초월한 낭만적 러브 스토리



"이 책에서 사랑은 병이다.

그런 점에서 낭만적 소설이다.

하지만 그 병은 우리 자신 너머의 운명이 아니라,

자기기만과 고집의 병이다."


_ 마이클 우드 <뉴욕 북 리뷰>









아낌없이 동의한다. 사랑은 병이다.

특히나 아직 '삶'이라는 대과제에 서툰 이들에게, 사랑은 종종 그 대상의 실체를 혼동하기 일쑤다. 그를 향한 사랑인가, 그 감정에 취한 나를 향한 사랑인가.


사랑이라는 숭고하게 추앙된 절대 가치 아래, 이기심과 집착으로 추악한 자신을 마주하게 추동한다. 하지만 이 열병 같은, 미숙한 사랑의 과정이 없다면 끝끝내 우리는 사랑의, 아니 삶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음을 직면할지도 모른다.


이 낭만적인 책의 마지막 장에서, 플로렌티노는 욕실에 틀어박혀 천천히, 마지막 눈물이 나올 때까지 모든 눈물을 쏟아낸댜.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기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스스로에게 고백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17세에 반한 첫사랑의 남편이 죽기를 51년 9개월 4일 동안을 기다리고, 80세가 다 되어가는 나이가 되서야 비로소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 그 장면은 서늘한 처연함으로, 사뭇 아리게 내려앉는다.




영원한 허니문, "목숨이 다할 때까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저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태생이다.


마약과 미인으로 점철되는 콜롬비아. 미드 <나르코스>를 통해 조금은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라틴아메리카의 억세고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처럼, 이 작품에서의 사랑은 세월의 흐름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며, 인내와 헌신적인 애정은 결국 행복한 결말로 보상받는다.


하지만 이 순애보적일 것만 같은 멜로 드라마의 표면 아래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라틴 아메리카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가 숨어 있다.


겉으로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시 라틴 사회의 위선적 도덕성과 계급 구조, 여성에게 강요된 순결과 헌신을 교묘히 비튼다. 지고지순해 보이는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실은 남성 중심 문화에서 정당화된 소유욕과 지배적 감정에 가깝다. 페르미나가 택한 결혼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신분과 안정을 선택한 냉정한 결단이자, 동시에 그 시대 여성에게 허락된 다분히 속물적인 선택이었다. 작품은 이를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 억압과 욕망을 은폐해왔는지를 드러낸다.



페르미나는 미망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남편 후베날은, 망고나무 위에 올라간 앵무새를 잡으려다 사다리에서 실족해 81세로 허망하게 죽는다. 이 시절 라틴 아메리카 문화가 '미망인'에게 남편을 따라 죽는 것까지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시선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둘, 플로렌티노와 페르미나는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영원한 여행을 선택한다.





사랑의 날들을 세어가던 한 남자의 이야기


① 51년9개월4일 동안 첫사랑의 남편이 죽기를 기다리다

② 623번 다른 여자를 만나며 첫사랑을 51년 기다리다

③ 53년7개월11일 동안 사랑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오래 하고 있는 사랑,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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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시대의 사랑]을 들고

태국의 꼬창 Ko Chang으로 떠난 적이 있다.



꼬창은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덕분에 조용하고, 물가도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인공의 손이 덜 미친 이곳에 닿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착륙한 후, 부라파 버스(40인승 대형 관광차)를 타고 파타야와 잔타부리를 경유해 뜨랏에 도착해야 한다. 거기서 다시 페리를 타고 40여 분을 더 가야만 꼬창에 발을 내딛을 수 있다. 7시간의 비행을 마침과 동시에 거의 10시간 가까이 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종일 이동해야 하는 모진 여정이다. 그럼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릇무릇, 태국의 모든 섬은 아름답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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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 식당에서

비슷한 시간에,

항상 혼자,

그저 책을 읽으며,

온갖 커리류의 태국 음식과 창(Chang)을 마셨다.


내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들은 나를 궁금해했을까?



내 꼬창에서의 열흘간의 휴가 동안, 초반 절반은 비가 내렸다. 우기였다. 내내 흐렸고 가끔씩 아니, 자주 스콜이 쏟아졌다. 더더욱 안타까웠던 건, (스스로의 선택에 실망한 대목은) 태국의 동남쪽은 우기였지만 서쪽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까오락Kao Lak을 가야 했어... 꼬팡안Koh Phangan을 가야 했어... 종일 리조트 태닝 베드에 누워 '갈까? or 말까?'의 고민을 수없이 반복재생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쓰는 데만 전념했다.


물론, 내 망설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건 '어떻게 가지?'였다. 도저히 마음만큼 쉬이 떠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시간만큼을 되짚어 방콕으로 돌아간 뒤, 다시 그만큼을 까오락이든, 꼬팡안이든 가면 됐으니... 그러니 어떻게 내 마음을 내 몸이, 내 이성이 따라갔겠어?????


그래서 그냥 이곳, 꼬창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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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씁쓸한 아몬드 향내는 언제나 그에게

짝사랑의 운명을 떠올리게 했다."


page 9.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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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꼬창에 햇살이 눈부시기 시작했다.

[콜레라시대의 사랑]도 2권으로 넘어간다.



먹구름이 사라진 꼬창은 눈부시게 평화로웠고 문명 이전처럼 순수하고 솔직한 아름다움으로 내게 만족스런 평온을 주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리조트 태닝 베드에서 태양과 썬키스트 Sun-Kissed를, 술을 마시며 책을 읽고 상념에 빠져 끄적거릴 따름이었다. 내 로망의 실현이었다.





그녀에게도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름진 그녀의 성적 매력은 아무런 영광도 없이 시들어갔고,

그녀의 사랑은 흐느낌 속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의 눈꺼풀에는 과거의 쓰라린 상처로 인해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지난날의 꽃이었다.


page 70. [콜레라시대의 사랑 2]





그러나 황폐해진 그녀의 몸 안에는

과거와 똑같은 여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page 165. [콜레라시대의 사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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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 내가 사랑을 했었나...



뚜렷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나이 드는 게 싫어서, 그 나이듦이 내 삶을 제한하는 것이 슬퍼서, 좌절했던 시기에 떠난 여행이긴 했다. 오직 여행에서만 내가 행복감을 느꼈던 시절. 이 책에서의 여행이 관계 회복을 위한 유일한 솔루션이었듯, 내게도 권태를 극복하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이를 한참이나 더 먹어 버렸고, 페르미나처럼 지난날의 꽃이 되어버렸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덜 초조하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알게된 유일한 본질은, '현재'와 '시간'의 소중함이다. 이렇게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을 여유도 생겼으니, 세월의 미덕을 조금은 입은 걸까.


이런,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설렌다. 아니,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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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제목에서 보여주듯, 이 책은 사랑과 질병, 그리고 늙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비평가 로빈 피디안은 이 작품을 라틴 아메리카의 미래를 위협하는 도덕적 이데올로기의 근시안에 관한 반성으로 읽는다. 바로 나이 드는 것을 죽음보다 끔찍하게 여기고, 노인들의 사랑을 추잡한 것으로 치부하던 그 시대의 사회적 터부에 대한 반성이다.


노화 공포증.

만약 이 책이 그것에 대한 자각이었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오히려 한껏 퇴보한 셈이다. 노화에 대한 공포는 모든 소비의 근간이 되고, 불안감을 부추기며 우리는 그것에 열렬히 반응하니까 말이다.

(그저 그렇다는 것일 뿐) 내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없다. 이 책은 그저, 내 아름다웠던 시절의 일면을 간직한 박제하고픈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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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page331 [콜레라시대의 사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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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끝은 과연 해피엔딩일까.


페르미나를 기다리며 반세기를 보내게 한 사랑이, 실은 자신이 이상화한 이미지에 빠져 있었던 것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한때, 내가 했던 사랑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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