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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그리고 엄마가 되기까지

1. 사랑에도 리허설이 있나요?

by 무 한소

아내라는 새로운 나의 자격이 주어졌다.



아내로 막내며느리로 그리고 동서로 제수씨 등으로 새로운 자신의 자격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주어졌다. 그전 세상에서는 딸로 누나로 동생으로 친구로의 자격에 이미 익숙했고 그 위치에서의 노력에 힘을 쏟아왔는데 모든 게 바뀌었다.


결혼이라는 삶의 큰 그림에는 패키지 상품처럼 신혼여행이나 결혼 이전의 연애기간은 결혼식이라는 축제에 보너스로 딸려오는 사소한 한 가지일 뿐이다. 그 이후 펼쳐진 굴곡진 삶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단지 화려하게 꾸며진 일일천하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축제 의식은 결혼식 이후 신혼여행까지 이어져 길게는 10일이 넘게 걸리고 아주 짧게는 결혼식 당일에 끝이 난다. 그 순간을 즐기고 달콤함을 느낀 이후 결혼이라는 길고 긴 터널 속에 진입하게 된다. 깊이도 넓이도 최대치로 확장되어 있는 굴곡진 내 삶이 바로 자신을 어둡고 긴 터널 속 깊은 곳으로 밀어버렸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로 내게 부여된 자격 아내, 며느리, 동서, 제수씨, 조카며느리... 등 갑자기 부여된 자격이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책임이나 의무에 대해 혼란이 생겼다. 각각의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 의무를 지켜내려 했던 그간의 노력으로 다른 건 다 덮어두고서라도 착한, 착하다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 수식어가 내 삶 전체를 대신하고 있는 듯 처음에는 그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만족스러웠던 걸까? 하지만 그것을 내 몸의 건강과 바꿀 수는 없다. 지치고 힘든 몸을 숨기고서라도 내게 주어진 자격에 대한 책임은 한순간의 의무였으며 어디서나 우선순위였다. 스스로 묶어둔 정해진 프레임에 자신을 가뒀다. 결혼의 햇수가 늘어나면서 의무를 다해 내려는 수애의 마음과 비례해서 늘어나는 책임에 따라다니는 양으로 점점 지쳐갔다.



과거 단상 위를 행진하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애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그 시간의 감정 또한 고스란히 전달된다. 생에 있어서 그 순간의 감정을 느꼈던 다른 경험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결혼과 함께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여전히 심장을 뛰게 한다. 쿵쾅쿵쾅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은 단상 위를 행진하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녀 머릿속에 계획했던 설렘이 지금도 가슴으로 바로 전달되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감정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을 때의 사랑의 감정은 그것을 벗는 순간부터 얼마나 길게 지속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달콤함이 제거된 반복적인 소리를 한다는 것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청자의 스트레스는 화자에 비할만한 것이 아니다. 말하는 입장에서는 몸속 머릿속에 그 고민부터 과정, 해결해 나가는 방향까지 그것을 모두 고스란히 안고 있어야 한다. 내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방덩어리처럼 항상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깊은 번뇌를 안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삶은 왜 이렇게 무겁고 무겁기만 한 걸까? 긴 삶 속에서 그 번뇌가 어디까지 깊어져야만 하는 걸까? 청자의 삶이든 화자의 삶이든 스스로 주도하는 능동적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닥친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얘기한다. 깊어진 번뇌를 잠시 제자리로 돌려주기 위한 일종의 처방이라 할 수 있다.

아내의 자격이 주어진 순간부터 수애는 몸속에 그냥 자리 잡기 시작한 번뇌와 스트레스, 그 속에 사랑이라는 건 과연 얼마만큼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을까? 그것조차도 자신감을 잃었는데 아내의 자격에서부터 파생되는 며느리의 자격이나 동서 제수씨의 자격은 보편적으로는 깊은 사랑보다는 스트레스의 범위가 훨씬 깊어질 거라 생각된다. 여러 가지가 맘먹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마음먹기는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깨지며 배워 나가는 속에서 생각하는 인격의 범위도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계절의 요인인지 결혼식이 한꺼번에 몰아치듯 날짜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주변 지인들의 결혼식을 보며 과거 모습으로부터 부모님의 결혼과 수애의 결혼식이 있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신랑 신부의 모습으로 그들이 식의 주체가 되어 있을 때는 뒷배경으로 깔려 있는 수많은 일들과 노력해 준 주변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여전한 허례허식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던 그 모습들이 결혼 이후 새로운 자격이 부여된 후에 순간순간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즐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거처럼 나라는 주체가 말하는 행위 속에 있을 때는 너무도 쉽지만 현실의 실행에서 주변인으로 함께 할 때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례허식은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적 문제로 드러났으며 반드시 개선이 필요한 사회적 태도로 볼 수 있다. 보이기 위한 결혼식, 친인척 간에도 간소화하거나 간단한 마무리로 끝내는 건 결혼 당사자들보다는 부모나 집안 어른들의 관점에서 오히려 수용하기 힘들어한다. 그것이 자신을 좀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주기도 하고 좀 더 입지를 단단히 해준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애에게 다시 엄마라는 새로운 자격이 주어진다.



엄마라는 자격은 결혼 이후에 여성에게 주어진 자격 중 지극히 자연스럽고 경이로운 것이다. 그 경이로움은 아이가 엄마 배속에 잉태되어 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그때가 최고의 벅찬 감정을 가장 충실히 누린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가 태어나고 커 가면서 아내의 자격과 엄마의 자격을 동시에 해결해 나가려는 그녀의 노력이 가상하다 싶을 만큼 의무감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부모가 수애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감사한 감정을 느끼기 이전에 온전히 흡수했고 그것을 '효'라는 일컫는 감정으로 희석해서 보여주곤 했었다. 그리고 받은 큰 사랑을 그녀의 자식들에게 엄마의 자격으로 무한으로 베풀어 주면서 수애가 그랬던 거처럼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음을 아프게 받아들이곤 한다. 과연 창조주가 있다면 우리 세상을 왜 이렇게 슬픈 사랑이 순환되게끔 만들었을까 의문을 던져본다. 때로는 맘이 지칠 만큼 아프다.


그 순간에도 수애는 실천한다. 엄마의 자격에 걸맞은 자세와 태도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맘껏 행하며 그것이 마치 의무인양 뿌듯해한다. 스스로 엄마의 자격을 매우 격조 있게 지키고 잘 행했다고 생각한다. 결혼 이후 여성에게 주어진 자격이 그들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삶에 얼마만큼 큰 책임감과 스트레스로 남을 것이며 그것이 그녀들을 번뇌하고 아프게 해 왔는지 다시 확인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은 여성의 자격이 되어 버렸다. 삶 속에 녹아있는 여성의 자리에서의 그 역할들은 사랑에 의한 의무감이 되어 버렸다. 결혼식을 행복하게 치른 뒤에도 여성은 각자의 자리에서의 의무감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자격을 다시 확인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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