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오늘 오후에 눈이 엄청 많이 온대요!" "엄마, 저녁까지 펑펑 쏟아진다고 하는데요?"
둘 사이 대화가 시작되고 몇 초나 지났을까?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이제 막 시작된 '눈'이 내리는 모습과 직면했다. 이번 겨울 속에서 내리는 눈과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다. 얼마 전에도 잠시 눈이 내렸었다. 지금까지의 눈은 소식으로만, 소리로만 전해 들었다. 소녀와 엄마가 확인도 못 할 짧은 시간에 눈은 잠시 내렸다가 목적지를 잘못 찾아온 것처럼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사라져 버렸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설렌다는 마음과 함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마법사가 끊임없이 눈을 만들어 내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함께 공존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고개는 자신의 눈높이 위쪽으로 향했고 시선은 가벼운 눈송이를 따라 움직였다. 그때 모녀의 움직임은 누가 누구를 흉내 내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누군가는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타자가 바라봤을 때 어쩜 저렇게도 똑같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리라. 소녀와 엄마는 동작도 같았고 생각도 닮았는지 설렘의 표정까지도 매우 흡사하게 닮아 보였다.
가던 길의 방향을 잠시 잃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리는 '눈'을 손바닥 위에 올려둔다. 눈꽃은 활짝 피었다가 잎이 떨어지듯 손바닥 위에서 생명을 다하고 스르르 녹아 버린다. 눈꽃의 크기와 쌓이는 모습을 살펴보니 함박눈이 분명했다. 그것도 습도가 덜한 최상의 완벽한 함박눈이었다. 걱정이 생겼다. 소녀는 자신이 댄스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난 다음, 기나긴 일정을 모두 마친 후 다시 도착한 집 주변에서 여전히 눈이 계속 내리고 있을지 걱정스러워졌다. 그래야 했다. 잠시 가졌던 설렘의 감정이 행복으로 길게 이어지길 바랐다. 그런 소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엄마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늦겠어. 서두르자!" 소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사진으로 남겨놓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버스를 타고 전철로 환승하기 전까지는 아직은 설렘이 있었다. 그리고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비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두려운 마음과 함께 설렘이 계속되었다. 전철을 타고 그녀들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점점 도착지와 가까워질 때쯤 소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잠시 손바닥에 올려 두었던 내리던 눈의 결정체보다 더 차가웠다. 갑자기 변해버렸다. 달래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 딸, 왜 갑자기 우울해졌어요? 좀 전까지는 기분이 정말 좋았잖아!" 머뭇거리던 딸이 짧게 자신의 감정을 담아 표출한다. "나도 내리는 눈 맞으며 친구들과 놀고 싶어... 친구들은 지금 모두 함께 모여 있다는데..."
토닥이고 조용히 있었어야 하는 걸까? 계속되던 우울함 뒤의 냉랭한 소녀의 표정은 엄마를 자극시켰다. 그 싸늘한 표정은 결국 엄마가 마음속에서만 되뇌었던 말을 내뱉게 했다. "네가 선택한 거잖아. 네가 하고 싶어서 엄마, 아빠의 설득과 거금이 들어가는 불편한 현실 속에서도 강행한 거잖아. 너무 좋아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으니까, 목표를 위해서라면 더구나 좋아서 시작한 거라면 사소한 감정 같은 건 참아야 하는 게 아닐까?" "누가 뭐랬나요..." 이후로도 그녀의 표정은 독립운동을 한 투사들보다 더한 의지가 숨어 있는 듯 냉정하고 단호해 보였다.
역삼역 6번 출구는 대부분의 전철역 출구들에 비해서 나가는 곳이 상당히 가파른 기울기로 되어있다. 다행히도 나갈 때는 체감적으로 기울기가 좀 덜 느껴지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가파른 기울기의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란... 처음에는 황당했다. 그리고 모녀는 기울기에 대해 얘기를 나눴었다. "계단의 처음과 끝이 이루는 기울기가 이 정도면 75°는 되는 게 아닐까요?" 소녀의 질문에 엄마가 대답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정말 급한 기울기라고 생각하는 것도 평지의 모양을 생각하고 계단으로 오를 때 45°를 넘는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가 없겠지. 순전히 엄마의 생각이다. 수학에서 기울기는 x의 변화(증가) 량에 대한 y값의 변화(증가) 량을 말한다. 엄마가 생각하는 계단의 기울기는 매우 가파른 것이 45°쯤 되지 않을까?라고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전철에서 내려 지하도를 빠져나갈 때 먼저 두 곳의 계단과 마주한다. 물론 그곳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있다. 다음으로 세 번째 만나는 계단은 앞서 언급한 대로 급경사에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겨우 숨을 참아가며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한 후 이제 곧 바깥세상과 마주 할 것이다. 그곳에도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까? 마침내 역삼역에 도착했을 때 걱정했던 것을 대답이라도 하듯 눈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방향을 반대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눈이 너무 많이 온다면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잠시 걱정에 빠졌었고 그것과는 상반되게 소녀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고비가 되는 기울기의 계단을 손잡이를 잡고 겨우 발걸음을 옮겨 역삼역 6번 출구를 탈출하 듯 나갔다. 순간 깜짝 놀랐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는 모든 게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펑펑 내리던 눈도 이제는 멈췄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운동은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으며 눈은 벌써 소복이 쌓여 있었다. 소녀가 자신의 에너지를 맘껏 펼칠 그곳까지 움직이는 길 또한 가파른 내리막을 몇 번은 더 지나야 했다. 소녀와 엄마는 뒤뚱거리며 조심해서 천천히 걸었다.
걸으며 소녀는 함박눈에 함박웃음을 지었고 곳곳의 맑은 아름다움과 설렘으로 밝은 에너지를 기록으로 남기느라 매우 바빴다. 예뻤다. 함박눈이 내린 곳곳의 설경이 아름답고 그것과 물아일체가 되어버린 소녀의 함박웃음이, 설경과 어우러진 소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엄마를 설레게 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그곳, 그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맑고 순수한 순백을 느끼고 즐기며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면 그만이라고 소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표현했다. 맑은 두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걸어서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이제 소녀와 엄마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서 방향이 다른 각자의 길을 간다. 소녀는 감춰진 에너지를 맘껏 분출해서 아름다운 선으로 그려낼 그곳으로 갔다. 엄마는 깊은 숲 속에서나 존재하는 동화 속 그곳 카페를 향해 비워내고 뱉어내기를 하러 움직였다.
핑크 핑크 한 그 카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살펴본 엄마는 깜짝 놀랐다. 머리 위를 시작으로 몸 곳곳과 가방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헛웃음이 나왔고 그것들을 카페 입구에서 다 털어냈다. 그리고 겨우 '0'의 경계에서 안으로 들어간다. 카페는 여전히 엄마를 집중하게 했고 그 집중 안에서 과거가 조금씩 꼬리물기로 떠오른다. 긴 시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나는 과거의 삶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향이 좋은 진한 커피와 달콤한 쿠키가 엄마 앞에 놓여있다. 그녀는 바깥 풍경이 자유롭게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를 선택해서 앉았다. 오늘 카페에서 만나게 될 엄마의 과거 꼬리물기의 시작점 출발점은 눈일까 함박눈일까... 궁금해졌다. 앉아있는 엄마의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바깥 풍경에서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달콤한 쿠키를 조금 잘라서 입 안으로 넣고 단맛이 퍼질 때쯤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목 넘김을 했다. 환상적인 지금의 조합과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이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귀갓길은 여전히 평탄치 않을 거고 그때쯤이면 눈이 멈추리라. 하지만 지금 '0'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이상 이 감정을 충분히 누리고 가능하다면 꼬리물기로 그 거대한 생각을 좇고 싶다. 목 넘김을 한 후 내려놓은 커피의 향이 코를 찌르듯 파고 들어온다. 때마침 새로운 쿠키 굽기를 시작했는지 동화 속의 카페에서는 쿠기의 달콤하고 버터의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콧속으로 들어와 후각을 자극하며 과거로 거슬러 가 있는 엄마의 기억을 더 부드럽고 고소하게 만들었다. 왜 이토록 행복감으로 가득 찼는지 생각해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이 과거 기억들로 통째로 추억의 영화가 되어 들어왔다. 커피와 쿠키는 영혼과 호흡을 평온하게 도왔다. '오늘도 역시 '0'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시간이 지나면 소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리라. 그때까지 지금의 행복한 감정을 충분히 누려야 한다.
꼬리물기를 하며 도착한 과거의 그곳이 엄마의 눈에 어렴풋이 비쳤다. 20대 중반이었다. 그때도 함박눈이 왔었나 보다. 주변이 온통 새하얗다. 그곳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날이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다. 눈에 익은 관계망 속에서 지금의 가장 굵고 큰 연결고리는 결혼과 함박눈이다. 어쩐지 설렘이 되살아 났다. 결혼의 선택 이후 쌓인 강하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영화의 영상은 오랫동안 엄마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그때까지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순수한 엄마의 표정은 함박눈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더욱 빛내 주었다. 물론 평행을 이루는 책임은 이미 레벨과 무게를 수치로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결혼의 선택으로 생긴 책임과 의무는 그때부터 끊임없이 쌓고 있었으며 지금도 실천의 과정에 놓여있다. 여전히 오늘도 그 과정을 걷고 있다. 책임과 의무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완전한 부분집합이기도 한 엄마의 그 순간을 '딸'과 '함박눈'이 함께했다.
※참고
카페로 들어가는 부분을 '0'의 경계 안으로라는 표현으로 쓴 건 이전 글 《익숙함에서 만나는 새로움》을 참고하시면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https://brunch.co.kr/@ef814761a51c49a/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