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침묵이 말하는 것
엎드린 아이에게서 나오는 무거운 에너지나 무표정은 단순한 게으름에서 오는 나태도 무력감도 아니었다.
그건 사회 제도나 교육 체제라는 프레임이 아이에게 씌운 굴레 속에서, 숨 쉴 아주 작은 틈을 찾으려는 최후의 방어기제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나는 상황을 회피하거나, 자꾸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되었다.
가로 500 ×세로 700cm의 작은 공간의 교실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이미 사회 축소판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책이나 노트보다 더 무거운 에너지와 압력이 있었고, 창문 밖 풍경은 자유가 아니라 경쟁으로 향하는 막다른 길의 또 다른 입구일 뿐이었다.
긴 시간 강단에 섰고, 옆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제대로 된 공부를 강조해 왔다.
모순적이게도 나 역시 아이들에게 정해진 답을 요구했는지 모르겠다.
선택에서 아이들은 일찍부터 정해진 답안을 강요받았다. 지금 공부를 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고, 그 길이 가장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대부분 아이들에게 예외는 없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성적이 인생을 결정....”
그 말들은 취업으로 이어지는 것에도, 노릇이라는 자리의 책임을 주며 마치 진리처럼 전해졌다. 나는 아닌 척, 보편적 어른들과 뭔가 다른 것처럼 하지만...
진리처럼 반복되는 그 말들은 사실 누구의 소리일까? 부모일까, 교사일까. 아이들 스스로 규정한 프레임, 늪일까. 아니면 이미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합창일까.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의 눈빛은 차갑게 굳어갔다.
가끔 아이들은 묻고 나는 다시 반문한다.
“여러분, 왜 공부를 해야 하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부는 뭘까요?”라고.
아이들이 처음 던진 질문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진심이었으리라. 그건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마지막 저항의 방식이었다.
무심한 듯한 태도, 삐딱한 몸짓은 사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한 무언의 고발이었다. 나는 보드마카를 쥔 손끝이 잠시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가르친다고, 가르쳐왔다고 믿었던 나는, 오히려 그 아이들의 침묵 속에서 다시 배우고 있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는 교실을 넘어,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표정 뒤에 숨어 있는 건 포기가 아니라, 살아내려는 힘, 버티려는 의지였다. 그건 아이들이 선택한 또 다른 언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언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울음이 섞여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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