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트리_너는 이미 잘하고 있어
수업을 마친 뒤, 한 아이가 조용히 옆에 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자꾸 제 입장에서만 보고 말하게 돼요. 그리고 나만 피해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둘 다 문제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게 잘 안 고쳐져서 너무 답답해요.”
아이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오래 참아온 혼란과 답답한 피로가 숨겨져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편집된 세계’에서 삶을 배운다
그들이 집중하고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 미디어는 원하는 장면만 잘라 보여주고, 보고 싶은 방향으로 세상을 재구성한다. 아이들은 그런 자극적인 화면, 영상 속에서 놀이도 공부도 했고 어쩌면 당연하게 그렇게 성장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계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방식’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법, 거절하는 법, 상대의 세계를 상상하는 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건 결코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성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을 뿐이다. 조금은 무섭기도 한 그런 세계를.
아이는 ‘자기 문제’를 알고 있었다.
이게 가장 놀라운 지점이었다.
“저도 문제라는 걸 알아요.” 이 말은 단순한 반성이나 죄책감이 아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겠다는 의지다. 요즘 k-중3에게서 보기 어려운 마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오해, 상처, 갈등이 생기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먼저 따진다.
앞서 고민을 털어놓았듯 아이는 상대도 문제, 자신도 문제라는 것을 동시에 바라볼 줄 알고 있었다. 이건 이미 긍정적인 해결을 절반은 넘은 상태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은 ‘함수’와 몹시 닮아 있다
나는 아이에게 가볍지만 조심스레 말했다.
“너는 지금 너의 좌표만 보고 있어. 근데, 관계라는 건 둘 사이에서 어떤 선, 그래프가 만들어지는가를 보는 거야.”
수학에서 함수는 두 존재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설명한다. 점 하나만 바라보면 그래프는 보이지 않는다. 둘 사이 서로의 좌표가 있어야 관계라는 선이 그려진다.
아이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함수의 정의는 어려워도 ‘둘 사이의 선’이라는 것을 그래프에 옮겨서 했던 표현은 마음에 닿았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이해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성인인 나도, 부모도, 친구도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안쓰러움과 사랑스러운 마음에 아이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잘하고 있어. 자기를 돌아보고, 상대의 마음도 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야. 선생님도 잘하지 못하는 것을 너는 이미 해내고 있어 ”
아이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이의 가벼운 마음이 움직였는지 내게도 어떤 밝은 에너지가 전해졌다. 중3이라는 나이는 이해하고 싶지만 표현할 언어가 아직 부족하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부정의 에너지는 넘치고 긍정 에너지가 조금은 모자란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는 시기다.
아이들은 겉으로 무표정하고, 무기력해 보이고,
돌아보면 별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안에서는 매일 작은 싸움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때론 타자와. 견디고, 버티고, 다시 노력하고 있다.
오늘 아이는 다시 자기 좌표에서 한 칸 앞으로 어쩌면 옆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