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이 필요했던 도구 콜렉터
엄마의 후계자가 된 남편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밤에도 그의 얼굴은 유독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자신이 뜨개 장인이 된 것처럼 어깨는 봉긋 솟아 있었다. 그런 기세등등한 그를 바라보는 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불쑥불쑥 좋지 않은 장면이 떠올랐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아 조만간….'
곧 우리 집 앞에 쌓이게 될 회색 플라스틱 배달 용지들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바구니 덕후인 그가 가장 사랑하는 바구니에 담겨서 말이다.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작도 전에 도구를 먼저 사는 사람. 집에는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가 사 모았지만, 한 번도 열지 않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2PM이 한 광고를 보고 부러워하다 산 검은색 세트 요가복이랄지. 기안84를 따라 하려고 산 하얀색 러닝화나 홈쇼핑에서 보고 색깔별로 산 운동 밴드까지.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입사 1개월쯤 돼서였나, 회사에 족구 동호회 있다는 말 한마디에 동호회 신청보다 먼저 족구화를 샀다. 하지만 며칠 안 가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족구화는 그의 퇴사 선물이 되었다. 한 번도 모래를 밟아보지 못한 채 말이다. 다행히 그 족구화는 구구절절한 환불 사유를 적고 나서야 육천 원이라는 이별 비용과 함께 우리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아파트 어딘가에 수년째 주인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자전거가 있다. 주인을 한 번 모시고, 200미터를 달리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된 검은색 자이언트 자전거.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뿌옇게 먼지 쌓인 자전거가 불쌍해 보인다며 자전거 헬멧을 사는 게 아닌가? 그의 표정엔 앞으로 자전거를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까지 엿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알았다. 그래서 경고했다. 외로운 물건 하나 더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파란색 헬멧은 플라스틱 비닐에 담겨 우리 집 현관문에 배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헬멧 역시, 한 번도 뜯기지도 못한 채 옷장에 갇히게 되었다. ('아~불쌍한 헬멧이여, 내가 더 말려야 했는데. 미안해.')
그런 그였기에, 뜨개질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며 입술을 내미는 그가 심히 불안했다. 무언가 살 의지는 있지만, 행동할 의지가 없는 남편의 지난 행동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남편은 입술을 쭈욱 내밀고 핸드폰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분명 말리지 않으면 대참사가 또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남편을 조용히 안방으로 불렀다. (남편은 참고로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무서워한다. 왜인지 모르겠다.)
"승준아~무턱대고 무슨 세트부터 사지 말고. 코바늘 한 자루와 연습용 실은 한 타래만 사자!"
"내가 코바늘 세트 담았는지 어떻게 알았어? 이거 봐봐 이쁘지?"
그는 웃으며 바구니에 담겨 있던 코바늘 세트 꾸러미를 보여주었다. 나는 안된다며 쇼핑목록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세트 하나도 하나라며 사면 안 되겠냐고 다시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세트는 안돼. 한 자루만 사" 라고 말하며, 더 이상 네 물건을 놓을 공간이 없다며 그동안 그가 산 잡동사리들을 손가락을 가르켰다.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이며 고개를 떨궜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렸는데 바로 세트부터 사지 않겠지. 그를 한 번만 더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분주해졌다. 남편은 한 자루라도 사라는 내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만 요란하면 좋으련만, 눈과 연결된 입도 바쁘게 움직였다.
"여보! 이건 어때? 튤립이라는 건데."
“…“
"여보, 이건 어때? 독일제인데."
“….”
"여~~~ 보!! 이건"
"아아아아악"
그는 세트로 사지 말라니까, 고르지를 못했다. 하나만 사면 실패할 경우가 크다며, 밤새 내 귀를 괴롭혔다. 그리곤 도저히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제가 코바늘을 사려고 하는데, 튤립이랑 크로바 중에 고민하고 있는데요. 어떤 걸 쓰세요?"
"아들, 브랜드는 모르는데. 그때는 급하게 구한 거라 나무 막대기 코바늘이라고 하면 알려나?"
"그거 딱 한 개만 쓰신다고요…? 그럼, 그건 몇 호예요?"
"글쎄, 중간인가?"
"네…."
남편은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딱 봐도 다양한 코바늘을 사고 싶었는데, 딱히 나에게 댈 명분이 없어 보였다. 나는 축 처진 남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전문가는 도구를 탓하지 않지. 넌 상대를 잘못 택한 거야. 그래도 구경도 할 겸 뭐든 다 있다는 다 있소에 가볼까?"
"그래도, 인터넷이 싸고 좋은데."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남편은 몰랐던 것 같다. 다 있소에서 만날 뜨개질의 신세계를. 우리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장 큰 매장을 향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주문을 걸었다.
'우리야, 예쁘고 귀여운 건 집에 오면 다 쓰레기야. 난 널 믿지만 네 손은 믿지 않거든. 적어도 너만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