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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01. 2022

벌써 화장을 하고 싶다고?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67

화장품을 사고 싶다고?

12월 초,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둔 롯데백화점 서면점엔 사람으로 넘쳐났다.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던 백화점을 최근 몇 년, 매 주말마다 가고 있다. 딸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우기 때문이다. 1학년 때는 그나마 한산한 센텀점에서 배웠는데 선생님이 서면점으로 움직이시는 바람에 따라갔다. 서면점은 부산 본점이라 평일에도 붐비는 것이 당연한 곳이니 토요일엔 말할 것도 없다.      


"아빠, 나 화장품 사고 싶어."

"응, 어떤 거?"

주산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상가로 막 내려오는 길이었다. 지하상가의 한 화장품 매장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팔레트 같이 생긴 색조 화장품 광고였다.     

"벌써? 지금?"

"아니. 고등학생쯤?"

"그런 건 엄마랑 상의해."

"엄마가 스무 살 넘어서 하래."

"엄마 말이 맞아. 지금도 예쁜데 굳이 왜... 어릴 때 화장하면 피부만 망가져."

"아니 그래도..."

"그럼, 아빠를 설득해 봐."

"그러니까 봐 바. 아빠, 지금 내 얼굴은 그냥 얼굴이잖아. 이 얼굴을 애들이 학교에서도 보고 다른 데서도 계속 볼 거잖아. 그런데 뭔가 상황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응? 뭔 소리야."

"그러니까. 나중에 고등학교 가면 무슨 스터디 카페 이런데 가면 거기선 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고."

"엄마를 설득해봐."

"엄마는 안 돼."


사회적 존재로 큰다.

어빙 고프만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벌써 저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데 약간 놀랐다. 어쩌면 예감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딸의 친구들 중엔 어떤 애가 싫다고 따돌리는 애도 있고,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 있기 위해 스마트폰 게임을 무기로 아이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애도 있다. 그저 만나면 좋고, 같이 학교 가면 행복한 그런 친구, 그런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일종의 사회적 존재를 위해, 그 존재감의 확보와 유지를 위해 애써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우린 다 그렇게 어른이 되니까.    

 

난 십 대 초반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교회를 다녔다. 그냥 다닌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성실한 교인이었다. 그 사이 검정고시를 치렀고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교인들을 제외하면,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대학 때는 그 과의 1기여서 대학 생활에 대해 배울 수도 없었고 기숙사 생활을 4년 내내 하는 바람에 오히려 신입생들의 생활을 돌봐주는 위치에 더 오래 있었다. 게다가 기숙사 동료들하고 거의 형제처럼 지내다 보니 이렇다 할 격식을 차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뭐랄까 사회화가 덜 된 상태에서 사회에 나가게 됐다.      


어딘 가에도 썼지만 <카피라이터 1년 차, 이렇게 입어라>, <성공하는 카피라이터의 옷차림>과 같은 책을 본 적도 없고 그런 걸 가르쳐준 선배도 없었다. 대학 시절 입던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그나마 격식이란 걸 차리고 의식하게 된 건 2년 차 때부터 대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부터 아닐까? 내 강의를 들으러 와 준 학생들, 비싼 등록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오전 수업을 듣기 위해 이 먼 곳에 있는 강의실까지 오는 학생들에 대한, 어떤 예의랄까? 뭔가 돈 값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소위 최카피 스타일이라는 게 정착됐다.      


그 이후로 지난 20여 년 간, 카피라이터로써 고객과 만날 때, 집에서 일할 때 등 상황에 맞게 내 역할을 구분하여 마음 자세와 옷차림을 자동적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바꾸게 됐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아빠는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익혔던 사회적 존재와 위상 정립을 위한 외적인 시도를 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려 하는 것이다. 무려 30년을 앞서 간다. 그만큼 인생의 피곤한 시기가 더 길어지려나?


그래도, 아직은 친구

요즘 규랑이는 제시간에 나온다. 은채를 보면 총총총 달려 다가온다. 규랑이 별명이 감귤이라고 해서 "안녕 감귤씨, 왜 뛰어오셔."하고 말을 걸면 배시시 웃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느껴지는 눈웃음이 보인다. 딸과는 다르게 좁은 어깨에 작은 골격이다. 딸이 무슨 보디가드처럼 느껴질 정도로... 바이올린 가방에 기관총을 숨기고... <데스페라도>의 주인공처럼.     


둘은 여러모로 다르다. 추정컨대 가정환경이나 그 구성, 분위기, 성적이나 성격 등등... 그러나 왠지 잘 어울린다. 그런 게 친구겠지. 달라도 어울리는 사이. 말해 놓고 나니까 어쩐지 친구의 정의를 말해버린 기분이다. 달라도 어울리는 사이... 여기에... 같아지기 위해, 닮아지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편한 사이라는 정의를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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