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전해질지도 모를 진심

덕질 대상에게 편지를 쓸 때의 설렘

by 안나 Anna


요근래 부쩍 편지를 쓸 일이 자주 생겼다. 주변 지인 중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긴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꼭 축하 목적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시간 내어 편지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보통 바로 펜을 들지 않고 휴대폰 메모장에 미리 할 말을 적어뒀다가 편지지에 옮겨적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편지를 한 번 쓸 때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인으로부터 편지의 한 구절을 언급하며 감동 받았다고 말해주는 장문의 문자를 읽을 때면 이러한 노력이 전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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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의 편지 쓰기 버릇은 열다섯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생 최고의 반항기라 불리는 중학교 2학년 시절, 당시의 나는 한 아이돌 가수의 덕질이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개 학생 팬이었던 나는 폭발하는 팬심을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하던 중 찾게 된 것이 바로 ‘편지 노트’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글로 옮겨 적었다. 열다섯 살의 나는 언젠가 그들을 만나게 됐을 때 내 진실한 마음이 담긴 이 노트를 꼭 전달할 수 있으리란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수능 샤프로 꾹꾹 눌러쓴 노트에는 군데군데 번지거나 지워진 자국도 많다. 편지라고 하기에는 나의 신세 한탄을 털어놓은 내용이 더 많으니 사실상 일기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시 나만의 은밀한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거의 두 권을 꽉 채운 이 편지 노트는 지금도 여전히 내 방 책장에 꽂혀있으며, 이사 갈 때마다 무조건 챙기는 것 중 하나가 됐다. 일기인지 편지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문장들은 그렇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의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되었다. 이런 나의 학창 시절을 보면 '사실 편지는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범접할 수 없는 우상과도 같은 연예인에게 쓴 편지는 더더욱.


그렇게 성인이 되고 난 후 자연스레 아이돌 덕질과는 거리감이 생겼다. 대신 우연히 본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한 배우를 좋아하게 됐다. (원래 덕질은 장르만 달라질 뿐 덕질 자체를 그만두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요즘 하루는 어떠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환절기 감기 조심하라는, 남들이 보면 다소 형식적인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 시작과 끝을 썼다. 그 사이에는 개인적인 일상이나 진심이 담긴 응원의 말들을 가득 적어넣었다. 그렇게 편지를 전해준 당일, 해당 배우의 SNS 계정에 들어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그날 받은 모든 편지에 대한 답장을 일일이 적어 올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해당 배우의 정성 어린 팬레터 답장은 X(구 트위터)에서 잠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적도 있다. 지금까지 줄곧 답장 없는 편지만을 적어 왔던 나는 예상치 못한 일에 부끄러운 감정을 넘어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답장을 바라는 마음으로 쓴 편지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편지 쓰기’는 나에게 소중한 취미로 남아있다. 나의 편지를 받고 행복해할 상대방의 얼굴을 떠올리며 예쁜 말들을 골라 담아 펜으로 써 내려가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다. 답장이 오든 오지 않든, 편지의 전달 여부도 크게 상관없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예전보다 편지를 받는 상대방만큼이나 나를 더 신경 쓴다는 것이다. 온전히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며 적는 글, 그 글을 쓰는 나의 감정 또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편지는 쓰는 만큼 돌아옵니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순수한 행복만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니까요.

내가 덕질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겠다! 앞으로 내가 편지 자주 써 줄 테니까.